크기는 가로 112cm×세로 115cm이며, 장지(壯紙), 필사본이다. 현재 오광정(吳光廷)의 19세손 오경환(吳璟煥)씨가 소장하고 있다.
족도는 특별한 체제에 구애되지 않고 대수에 따라 종으로 후손들을 도식(圖式)한 족보의 초기 형태이다. 15세기 이전에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가계를 기록했으며, 15세기 중반 경에 보도(譜圖)를 기본으로 하여 자표(字標), 범례(凡例), 부록(附錄), 서발문(序跋文) 등이 추가되면서 정식의 족보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족도의 체제는 표제(表題), 족도(族圖), 발문(跋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인 해주오씨족도는 원래의 명칭은 아니고 후대에 첨부된 것이며, 그 하단에는 쌍행으로 “전서공휘광정초창(典書公諱光廷草創) 사인공휘선경도사(舍人公諱先敬圖寫)”라는 주기를 통해 작성자를 명기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좌측 하단의 발문에도 원래 이 족도는 오광정(吳光廷)의 초본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 오선경이 완성한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족도에는 해주오씨를 중심으로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혼인관계에 있었던 장흥임씨(長興任氏), 경주김씨(慶州金氏), 수원최씨(水原崔氏), 여흥민씨(驪興閔氏), 행주기씨(幸州奇氏)의 가계가 함께 도식되어 있어 해주오씨의 상대 세계는 물론 혼반을 이해하는 데에도 크게 참고가 된다.
먼저 족도의 중심을 이루는 해주오씨는 1세 오인유에서 9세까지의 계보가 수록되어 있다. 1세에서 5세까지는 장자 중심으로 단선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자녀관계를 포괄하여 족도의 취지가 충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6세부터이다.
6세는 곧 당초 족도의 초안을 만든 오광정의 아버지의 항렬에 해당한다. 가계에 따라서는 8세까지만 수록된 경우도 있는데, 족도의 주인공인 오광정·오선경의 가계는 8세인 오선경에 그치고 있다.
자녀는 출생순에 따라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아들의 차서는 장자(長子), 2자, 3자, 4자 등으로 매겨져 있고, 딸(사위)은 차서에 따라 기녀(幾女)로 표기된 경우도 있고, 서(壻) 또는 여자(女子)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각 인물의 주기는 극히 소략하여 차서(次序), 관직,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현상은 족도의 작성자인 오광정·오선경 부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족도에 국한한다면 해주오씨의 시조는 오인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선경이 발문에서 오인유 이전의 세계가 담긴 속적(屬籍)이 우씨(禹氏) 집안에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오인유가 해주오씨의 시조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오인유는 1634년(인조 12)에 간행된 해주오씨족보 초간본(甲戌譜) 이래 모든 해주오씨족보에서 시조로 등록되었는데, 그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이 족도이다.
장흥임씨는 임원후(任元厚:守大師中書令)의 자손들로 오인유의 증손 오찰(吳札), 현손 오승(吳昇)과의 관계 속에서 수록되었으며, 김봉모(金鳳毛:平章事) 계열의 경주김씨는 오승의 처가였다.
그리고 최루백(崔婁伯: 國子祭酒) 계열의 수원최씨는 오찰의 처가였으며, 여흥민씨는 민지령(閔志寧: 禮賓卿)의 자손들로서 오찰의 손자 오민정(吳民政)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수록되었고, 기수전(奇守全:宰臣) 계열의 행주기씨는 오승과의 관계 속에서 수록되었다.
이 족도는 원본이 전하는 가장 오래된 족도로서 1600년 경에는 오희문(吳希文)·오윤해(吳允諧) 부자에 의해 부본이 작성될 정도로 해주오씨 가문 내에서는 그 중요성이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으며, 1634년에 간행된 해주오씨 갑술보의 저본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다만 오인유 이전의 상대 세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