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간본으로 흔히 ‘해주오씨 갑술보(甲戌譜)’라 불린다. 해주오씨는 1401년(태종 1) 오광정(吳光廷)·오선경(吳先敬) 부자에 의해 족도(族圖)가 작성되는 등 비교적 일찍부터 가계 기록 의식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이래 17세기 초반까지 족보가 간행되지는 못했다.
이에 16세기 후반 경 오희문(吳希文)이 족보 간행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족형 오안국(吳安國)의 집에 소장되어 오던 오선경의 해주오씨족도를 전사하는 한편 아들 오윤해(吳允諧)로 하여금 초보(草譜)를 작성하게 하는 등 족보 간행을 위한 준비 작업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오희문 당대에는 간행을 완료하지 못하자 그 아들 오윤겸이 관향지인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오숙에게 간행의 일을 일임한 것이다. 이에 오숙은 임지인 해주에 도착한지 수개월만에 간행을 완료하였는데, 저본이 된 것은 역시 오윤겸이 전사한 족도와 이를 바탕으로 작성된 오윤해의 초보였다.
당시 해주에는 진사 오강(吳綱)과 생원 오생운(吳生韻)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비록 오인유(吳仁裕)의 후손 여부는 미상이었지만 해주오씨는 일원(一源)이라는 입장에서 별보(別譜) 형식으로 이들을 수록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갑술보는 오인유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위 두 계열이 첨부된 형태의 족보라 할 수 있다.
전술한 대로 갑술보는 해주오씨족보의 초간본으로 상대 세계는 거의 전적으로 오선경의 족도에 입각하여 구성되었다. 그 단적인 예가 시조에 대한 인식이었다. 비록 오선경의 족도에는 오인유가 1세로 등록되어 있지만 오인유가 사실상의 시조가 아님은 분명한 것 같다.
왜냐하면 족도의 발문에 따르면, 오광정 당시만 하더라도 오인유 이전의 선계(先系)가 기록된 속적(屬籍)이 단양우씨가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여러 여건으로 인해 미처 이를 수록하지 못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술보는 족도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여 오인유를 시조로 수록하였고, 이런 인식은 이후에 간행된 해주오씨족보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따라서 갑술보는 해주오씨의 상대 세계 확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족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