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영병마사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변방에 외침이나 변란이 발생하였을 때 파견되었던 기구이자 관직.
이칭
이칭
대번병마(大番兵馬)
제도/관직
설치 시기
고려 전기
폐지 시기
고려 후기
소속
도병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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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행영병마사는 고려시대에 변방에 외침이나 변란이 발생하였을 때 파견되었던 기구이자 관직이다. 처음에는 대번병마(大番兵馬)라고 하였다가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를 거쳐 1047년(문종1)에 행영병마사로 개칭되었다. 재신이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추밀과 직사3품관이 파견되었으며, 위로 행영병마판사(行營兵馬判事)가 있고 아래로 지행영병마사(知行營兵馬事), 행영병마부사(行營兵馬副使),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행영병마녹사(行營兵馬綠事), 행영병마별감(行營兵馬別監) 등이 설치되었다.

정의
고려시대, 변방에 외침이나 변란이 발생하였을 때 파견되었던 기구이자 관직.
설치 목적

고려시대에 변방에 외침이나 변란이 발생하였을 때 특별히 파견되어 병마(兵馬)를 통솔하고 적을 막도록 도병마사에 설치된 기구이다.

임무와 직능

외침이나 변란 등 유사 시에 병마의 권한을 지고 임시의 군영에 파견되어 적과 전투를 지휘하는 임무를 가졌다. 기구의 구성은 위로는 재신(宰臣)이 임명되는 판행영병마사(判行營兵馬事)가 있고, 아래로 추밀(樞密)과 3품관이 주로 맡는 지행영병마사(知行營兵馬事),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행영병마녹사(行營兵馬錄事), 행영병마별감(行營兵馬別監) 등이 있다. 조직은 병마사 기구와 거의 동일하다.

차이점은 병마사는 상설 기구로, 주로 3품관이 맡았고, 군사적 변란에 직접 대처하기도 하지만 필요한 사전 준비와 국경 획정, 성지(城池) 개척 등의 일을 주로 맡았다면, 행영병마사는 외침과 소요를 막기 위한 군사적 지휘 통솔의 역할을 맡았다.

한편 직무상 중복과 충돌 가능성도 있어 사안에 따라 재추의 지위에 있는 병마판사(兵馬判事)와 행영병마판사(行營兵馬判事) · 행영병마사를 파견할 때 어느 한쪽만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병마판사가 행영병마사를 겸직하거나 병마사와 행영병마사직을 겸직하기도 하였으며, 병마사가 지행영병마사를 겸하게 하여 원할한 협조체제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변천 사항

『고려사』 백관지는 행영병마사가 문종 이전에 대번병마(大番兵馬)라 불렸는데 업무와 임무가 맞지 않아 1047년(문종 1) 7월에 고친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1012년(현종 3) 6월에 강감찬(姜邯贊)을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한 사례에서 아님을 알 수 있다. 병마사가 처음 설치되는 989년(성종 8) 이후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단행본

박용운, 『"고려사" 백관지 역주』(신서원, 2009)

논문

박용운, 「고려시기의 행영병마사에 대한 고찰」(『한국중세사연구』 25, 한국중세사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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