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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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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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 운동.
내용

형평운동은 백정의 계급적인 해방투쟁과 민족적인 해방투쟁의 두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백정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인 지배 관계를 유지시키려는 정책을 펴,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이력서 등에 반드시 신분을 명기하도록 했다. 때문에 당시 백정은 자신의 신분을 호적상 도한(屠漢)으로 기재하든지 붉은 점[赤點]으로 표시했으며,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또한 그대로 존속되었다.

당시 백정의 수효는 형평사 통계에 의하면 40여 만명이었고,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3만 3712명이었다. 이들은 일부가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본업이라 할 수 있는 도살업·제혁(製革)·유세공(柳細工) 등에 종사했으며, 주로 삼남지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1926년 이들이 형평사의 명의로 총독부에 제출한 요망서를 보면, ① 일반인에 의한 차별과 박해가 심한 것 ② 관공리·교원이 차별 대우하는 것 ③ 목욕탕·이발소·요리점 등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것 등을 지적하고, 취체(取締)를 법제화할 것을 요망했다.

이러한 백정들의 신분에 대한 불만은 형평사 조직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백정의 신분으로 자산가가 된 이학찬(李學贊)이 백정에 대한 교육차별에 분개해 신현수(申鉉壽: 양반)·강상호(姜相鎬: 양반)·천석구(千錫九: 양반)·장지필(張志弼: 백정) 등과 진주 대안동(大安洞)에서, 회원 80여 명과 더불어 창립총회를 열어 형평사를 설립했다. 임시의장 강상호의 사회 아래 형평사 취지서와 사칙(社則)이 채택되었다.

이어 역원선거로 들어가 위원 (중앙집행위원)에 강상호·신현수·천석구·장지필·이학찬, 간사에 하금석(河金石)·박호득(朴好得), 이사에 하윤조(河允祚) 등 7명, 재무에 정찬조(鄭贊祚), 서기에 장지문(張志文)이 각각 뽑혔다. 그리고 형평사의 유지방침, 교육기관의 설치, 그리고 회관(會館)설치, 각지로의 취지선전, 형평사 창립을 신문지상에 발표할 것 등이 결의되었다.

이와 같이 형평사가 창립, 탄생되었는데, 당시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진주재주의 백정동포가 궐기해 형평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계급 타파 운동을 시작하려고 한다. 이는 말할 나위도 없이 시대에 적합한 행동으로 생각된다. 운동으로의 철저한 노력을 백정동포에게 바란다.”라고 격려·지지했다.

형평사 창립 후 형평운동은 당시의 진보적인 사회운동단체의 지원을 받아 불과 1년 사이 각도에 형평사 지사·분사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형평운동의 급격한 발전은 사회적 반향을 가져왔다. 1923년 5월 진주에서 우육비매동맹(牛肉非買同盟)이 조직되었고, 7월 경상남도 삼가(三嘉)에서, 8월 김해와 충청북도 제천에서 반형평운동(反衡平運動)이 일어났다.

같은 해 11월 7일 대전에서 최초의 형평사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려 형평사 본사를 진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다는 사항이 결의되었다. 그런데 1924년 2월 10·11일 부산에서 개최된 형평사 전국임시총회에서, 본사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형평사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남북 양파로 갈리게 되었다.

남파(南派)는 경상도에 지지 기반을 둔 강상호·신현수 등 보수파이고, 북파(北派)는 전라도·충청도·강원도에 기반을 둔 장지필·오성완(吳成完) 등 혁신파였다. 혁신파는 부산대회 직후인 2월 13일 대전에서 형평사 혁신동맹준비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어 3월 12일 천안에서 혁신동맹창립총회를 열어 본사의 서울로의 이전과 잡지 『형평』 발간, 피혁(皮革)공장 설립 등을 결의했다. 한편, 강상호 등 보수파도 4월 24·25일 진주에서 전국형평사대회를 열었다.

이와 같이 형평사는 창립 후 불과 1년 만에 분열되고 말았다. 그 뒤 양파의 반목과 대립을 염려한 유지들에 의해, 5월 21일 남북협의회가 열려 현상타개의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고, 7월 양파간부들의 간담회가 열려 형평사 통일에 대한 토의가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그 결과 8월 15일 대전에서 형평사통일대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남북양파의 대표자 (장지필·강상호)의 퇴진이 결의되고, 형평사의 명칭을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로 고치는 동시에 본부를 서울에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양파 사이에 암암리의 내분은 그치지 않았다.

한편, 1923∼1924년 새로운 사회운동 단체(조선노농총동맹·조선청년총동맹 등)가 탄생하면서 이들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또 이들 단체와 제휴도 이루어지면서 형평운동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그 뒤 형평사와 형평운동의 통일 노력이 급진전 되면서, 1925년 4월 24·25일에 열린 제3회 전국대회에서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와 같은 통일 회복에 의해 형평사의 조직과 운동은 더욱 확대되어갔다.

각지에 형평청년회가 조직되고 중앙기관으로 12월에는 형평사청년총연맹이 탄생하게 되었다. 또,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형평학우회도 조직되어 각지에 권학단(勸學團)도 파견했다.

이러한 때 1925년 8월 반형평운동으로 경상북도 예천형평분사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형평사 본부에서는 긴급 회의를 열어 전국 형평사원이 예천으로 총출동할 것을 결의해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각 사회운동단체(화성회·조선청년총동맹 등)에서도 독자적으로 조사단을 파견해 형평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조사 결과 사건은 이곳 청년회원이 주동이 되어 일어 난 것으로 밝혀졌고, 이들의 사죄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의 진보적인 여러 사회운동단체와 형평운동과의 제휴는 더욱 강화, 촉진되어갔다.

이러한 정세 아래 각지의 형평청년회가 조선청년총동맹에 속속 가입, 제휴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1926년에 들어가 더욱 현저해졌다. 1926년 연두에 장지필이 새해의 계획으로 조직의 확충 강화와 무산운동(無産運動)으로의 진출을 선언한 것은 이러한 정세의 반영이었다.

또, 형평사총본부도 벌써 같은해 정월에 화요회(火曜會) 중심의 4단체 합동위원회 주최 재경(在京)사상단체신년간담회에 참가해 구체적인 제1보를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4월에 열린 형평사 제4회 대회에서도 무저항주의의 일소를 가결해 사회운동단체와의 적극적인 제휴 아래 실천운동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이후 각종 파업·소작쟁의 등에 참여하는 등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더불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 결과 이 시기 형평사의 조직은 다른 사회운동단체와의 제휴 아래 크게 확장되어갔다.

한편, 1926년 9월 임시대회에서는 사회주의운동의 분파투쟁의 영향으로 미증유의 내부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7년 1월에 일어난 고려혁명당사건(高麗革命黨事件)에는 장지필·서광훈(徐光勳) 등 중앙 간부가 연좌되면서, 이후의 형평운동에 급진파·온건파의 대립 격화를 초래했다. 형평사 조직은 이후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같이 해체되고 말았다.

이상과 같이 형평운동은 백정들의 자기해방운동인 동시에 일제식민지 치하에 있어 다른 사회운동단체와의 제휴 아래 민족해방운동의 일익도 담당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참고문헌

「형평운동: 평등사회를 위하여」(김의환, 『한국현대사』8, 청구문화사, 1971)
「일제치하의 형평운동고」(김의환, 『향토서울』31, 1967)
「朝鮮衡平社運動について」(池川英勝, 『朝鮮學報』83, 1977)
「朝鮮衡平社運動」(和定嘉秋, 『部落解放』52, 1974)
「朝鮮の衡平運動」(井口和起, 『水平運動史の硏究』6, 1973)
「朝鮮衡平運動の梗槪」(朝鮮衡平社本部, 『朝鮮及朝鮮民族』1, 朝鮮思想通信社, 1927)
「衡平運動の意義と歷史的 考察」(朴平山, 『正進』創刊號,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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