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민란 ()

만석보지 / 만석보 유지비
만석보지 / 만석보 유지비
근대사
사건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격분한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
이칭
이칭
고부봉기
정의
1894년(고종 31) 1월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격분한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이 농민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농민 봉기.
역사적 배경

당시 고부 군수의 수탈로 농민의 경제생활이 파탄 지경에 달하였다. 후일 전봉준이 술회한 공초(供草)에 의하면, 조병갑주1(侵虐)의 세목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주2(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목 아래 백성의 노동력을 함부로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보를 이용하는 민간에 대하여 상답 1두락에 2두세를, 하답은 1두세를 거두어 도합 700여 석을 착복하였다. 그리고 황무지를 백성들이 개간하면 문권을 주어 징세하지 않는다고 약속한 뒤 추수할 때 수세하였다.

둘째 부유한 백성들로부터 2만냥을 강제로 빼앗았고,

셋째 태인 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비각을 건조한다는 명목으로 백성들로부터 1,000여 냥을 거두었으며,

넷째 대동미 16두씩을 좋은 쌀로 거둬들인 후 나쁜 쌀로 바꾸어 상납하고 그 이익을 착복하였다. 그밖에 백성들에게 불효 · 불목 · 음행 · 잡기 등의 죄로 무고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이와 같이, 당시 고부군 일대에는 누적된 봉건적 모순이 집중적으로 자행되어 농민의 불만이 축적, 고조된 상황에서 전봉준의 지휘로 봉기하게 되었다.

경과와 결과

1월 10일 새벽 마항장(馬項場)에 모인 농민군 1,000여 명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고부읍의 3문을 부수고 관아로 쳐들어가자 조병갑은 달아났다.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옥을 파괴하여 억울한 죄인을 석방하고,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강화한 뒤 악질적인 이서배(吏胥輩)들을 문초하였다. 또한, 불법적으로 약탈해 간 수세미를 농민들에게 반환하고, 민원의 대상이 된 만석보도 파괴하였다.

약 1주일간에 걸쳐 관아의 폐정을 처리한 뒤, 주력부대를 마항장으로 옮기고 일부는 읍에 잔류시켰다. 그 뒤 1월 25일 전군을 요새지인 백산(白山)으로 옮겼다. 소식을 들은 각 처의 농민군이 전봉준의 휘하에 집결하여 전면전쟁으로 전환될 기세였다.

이 때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의 실책은 농민군을 더욱 자극하였다. 전봉준은 사방에 격문을 띄웠으며, 3월 21일 백산에서 봉기한 이후로 전면 전쟁으로 돌입하였다.

우발적인 것이나 촉발적인 것이 아니라, 1893년 3월의 보은집회 후, 호남동학농민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봉건 · 반외세 운동이 전봉준을 비롯한 호남의 동학 지방 접주들에 의해 뚜렷한 목표 아래 계획된 것이었다. 근래 발견된 「사발통문(沙鉢通文)」이 이를 구체적으로 증명해 준다.

의의와 평가

고부민란은 동학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동학난기록(東學亂記錄)』
『동학혁명실기(東學革命實記)』-초고본(草稿本)-(동학혁명모의탑건립추진위원회, 1971)
『동학사(東學史)』(오지영, 영창서관, 1940)
「갑오동학농민항쟁(甲午東學農民抗爭)의 신고찰(新考察)」(김의환, 『성곡논총(省谷論叢)』 8, 성곡학술문화재단, 1977)
「사발통문(沙鉢通文)」
「전봉준공초문(全琫準供草文)」
주석
주1

침범하여 포학하게 행동하는 일.    우리말샘

주2

백성의 힘으로 쌓아 만든 보루(堡壘).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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