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때 고을나(高乙那)의 후손 고후(高厚)가 신라에 조공(朝貢)을 하므로 신라의 왕이 기뼈하여 그를 성주(城主)로 봉하게 되어 이곳이 촌(村)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의종 때 현을 설치하였고 원종 때 삼별초(三別抄)를 평정한 뒤에 주(州)를 설치하였다가 충렬왕 때에 다시 촌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호촌천(狐村川)이 흘렀고 부근의 호아촌봉수는 동쪽의 자배악(自盃嶽), 서쪽의 삼매양(三每陽)봉수와 이어졌고, 해안지방을 잇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제주도 남쪽 해안평야에 발달하였던 하나의 큰 촌락이었다. 지금의 남원읍 지역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