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희인(希仁). 익령부원군(益寧府院君) 홍서봉(洪瑞鳳)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홍응운(洪應運)이고, 어머니는 임이원(任履元)의 딸이다.
1759(영조 3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762년(영조 38)에는 주서와 정언을 역임하였는데, 이 당시 주전(鑄錢)의 폐단을 강력하게 건의하였고, 이조판서 김상복(金相福)을 탄핵하였다. 1765년 정언(正言)에 제수되었고, 이듬해에는 부수찬(副修撰)에 올랐다.
11767년 북청어사(北靑御史)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겸문학(兼文學)·헌납(獻納)·수찬(修撰)을 차례로 역임한 후 이듬해부터 교리(校理)·사서(司書)·헌납·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69년 기생을 데리고 사는 관리들을 뽑아 올리라는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죄로 단천(端川)에 귀양갔다가 몇 개월 후 석방되었다.
그 뒤 헌납·장령을 번갈아 맡았다가 이듬해에도 교리·헌납·필선 등을 역임했고, 대신(臺臣)으로 있으면서 중의(仲義)의 사건에 일률(一律)도 발계(發啓)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삭제당하는 불운을 겪었으나 그 해 말 부교리로 복귀하였고, 1771년에는 수찬·사간(司諫)을 거쳐 1775년(영조 51)에는 승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