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홍처심(洪處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수항(洪受恒)이고, 아버지는 현감 홍우이(洪禹儞)이며, 어머니는 이팽령(李彭齡)의 딸이다.
1732년(영조 8) 성균관의 제술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되는 영광을 누렸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734년에는 정언(正言)에 올라 이양제(李亮濟)의 옥사(獄事)와 관련된 남태적(南泰績)·밀창군(密昌君) 등을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대신(臺臣) 신만(申晩)을 신구(伸救)한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초 정언으로 복귀하였으나 대론(臺論)의 문제로 다시 진도군(珍島郡)에 귀양갔다가 1737년 부수찬(副修撰)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
1739년 당시 단경황후(端敬王后)가 복위되자 중종반정공신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을 중묘정향(中廟庭享)에 제외시킬 것을 주장하다 잠시 하옥되기도 했으나 이내 석방되어 교리로 복귀하였다.
그 뒤 수찬으로 재직시 삼복(三覆)을 행할 때 배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중추고(從重推考) 당하였고, 그 뒤 이조좌랑·헌납·부교리·이조정랑·응교 등을 거쳐 사간(司諫)으로 재직시 대론의 문제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곧 직첩을 되돌려 받고, 부응교·집의 등을 거쳐 사간에 재등용되었다. 1742년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파견되었다가 48세의 일기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