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계유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이조정랑, 응교, 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 본관남양(南陽, 지금의 경기도 화성)
  • 사망 연도1742년(영조 18)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이조좌랑|헌납|부교리|이조정랑|응교|사간(司諫)
  • 출생 연도1695년(숙종 21)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박홍갑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정랑, 응교, 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홍처심(洪處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수항(洪受恒)이고, 아버지는 현감 홍우이(洪禹儞)이며, 어머니는 이팽령(李彭齡)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32년(영조 8) 성균관의 제술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되는 영광을 누렸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734년에는 정언(正言)에 올라 이양제(李亮濟)의 옥사(獄事)와 관련된 남태적(南泰績)·밀창군(密昌君) 등을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대신(臺臣) 신만(申晩)을 신구(伸救)한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초 정언으로 복귀하였으나 대론(臺論)의 문제로 다시 진도군(珍島郡)에 귀양갔다가 1737년 부수찬(副修撰)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

1739년 당시 단경황후(端敬王后)가 복위되자 중종반정공신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을 중묘정향(中廟庭享)에 제외시킬 것을 주장하다 잠시 하옥되기도 했으나 이내 석방되어 교리로 복귀하였다.

그 뒤 수찬으로 재직시 삼복(三覆)을 행할 때 배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중추고(從重推考) 당하였고, 그 뒤 이조좌랑·헌납·부교리·이조정랑·응교 등을 거쳐 사간(司諫)으로 재직시 대론의 문제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곧 직첩을 되돌려 받고, 부응교·집의 등을 거쳐 사간에 재등용되었다. 1742년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파견되었다가 48세의 일기로 죽었다.

참고문헌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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