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빈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병조참지,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계문(季文)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32년(영조 8)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풍산(豊山,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주요 관직
병조참지|경상도관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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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병조참지, 경상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문(季文). 홍중해(洪重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양보(洪良輔)이고, 아버지는 감사 홍창한(洪昌漢)이며, 어머니는 유두기(兪斗基)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77년(정조 1)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설행된 감제(柑製)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병조참지로 근무하였고, 1779년에는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체차(遞差)되었다.

이듬해 당시 풍산홍씨 권세에 의지하여 매관(賣官) 행위를 일삼았고, 관찰사 재직시 장오(贓汚)죄를 많이 범했으며, 매매가 금지된 돈동(敦洞)의 공주 집을 사사로이 매입(買入)하였다는 정언 홍주익(洪柱翼)의 탄핵으로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또한 역모사건의 주모자로 처형된 홍국영(洪國榮)과 홍복영(洪福榮)의 친숙(親叔)이기에 이 때에 연좌(連坐)된 죄로 다시 갑산부(甲山府)에 유배되었다. 그 뒤 1784년 유배지에 집을 사서 편히 살고 종을 놓아 사냥하고 몰래 부기(府妓)와 간통하여 아이를 낳기까지 하였다는 함경감사의 장계가 올라와 더 멀리 정배(定配)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1823년(순조 23) 그의 손자인 홍정주(洪定周)가 휘경원(徽慶園) 참봉으로 서용될 당시 장령 황경언(黃儆彦)의 불가 상소로 취소되었으나, 1850년(철종 2) 그의 증손(曾孫) 홍우길(洪祐吉)의 노력으로 도류안(徒流案)에서 삭제되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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