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화중(和仲). 홍숙(洪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홍봉조(洪鳳祚)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홍억(洪檍)이며, 어머니는 이의현(李宜顯)의 딸이다. 홍익(洪榏)에게 입양되었다.
1792년(정조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바로 홍문록(弘文錄: 홍문관의 제1차 인사기록)에 선발되었고, 또 병조정랑을 제수받았다가 강원도 간성(杆城)·양양(襄陽)·고성(高城)의 화재 때문에 위유어사(慰諭御史)로 파견되어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
이어 양주암행어사를 거쳐, 이 해 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호서안핵어사(湖西按覈御史), 경기의 교동(喬桐)과 해서(海西)의 연안(延安)·배천(白川) 등지의 암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 왔고, 문관출신의 비변사낭청으로 이름이 높았다.
1794년(정조 18) 명릉(明陵)의 친제시 대축(大祝)의 공으로 가자되었고, 이어 충청도어사 및 호서위유사의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 왔다. 이듬해 정언으로 재직 중 민사선(閔師宣)의 탄핵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797년(정조 21) 승지로 재직 중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김포군수(金浦郡守)로 좌천되기도 했다. 순조가 즉위하자 집권한 벽파(僻派)에 의해 내몰린 김이익(金履翼) 등이 제거되자 아울러 해남현(海南縣)으로 귀양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