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득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장령, 헌납, 병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재후(載厚)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9년(숙종 15)
사망 연도
미상
본관
남양(南陽, 지금의 경기도 화성)
주요 관직
장령|헌납|병조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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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장령, 헌납, 병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재후(載厚). 홍정설(洪廷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우적(洪禹績)이고, 아버지는 유학 홍현(洪鉉)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사헌 집의 홍상직(洪相直)의 아버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3년(경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분관(分館)시 승문원(承文院)에서 누락(漏落)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조용(調用)되었고, 1734년 9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1736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올라 과장(科場)의 폐단을 바로 잡는 데 힘써 노력하였고, 1740년 정언(正言)으로 진출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사헌부장령으로 복귀하였다. 1742년 남혜로(南惠老)의 사건이 발생하자 그를 파직해야 한다는 소를 올리다 견책을 받아 장령에서 체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그 뒤 1745년부터 장령·헌납을 번갈아 맡았다가 교리 한광회(韓光會)의 탄핵으로 일시 파직되기도 했으며, 1757년에는 병조참의에 올라 영조가 친히 행한 문신전강(文臣殿講)에서 70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능히 경서(經書)를 외었으므로 특별히 녹피(鹿皮)가 하사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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