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재후(載厚). 홍정설(洪廷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우적(洪禹績)이고, 아버지는 유학 홍현(洪鉉)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사헌 집의 홍상직(洪相直)의 아버지이다.
1723년(경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분관(分館)시 승문원(承文院)에서 누락(漏落)되었다가 1725년(영조 1)에 조용(調用)되었고, 1734년 9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1736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올라 과장(科場)의 폐단을 바로 잡는 데 힘써 노력하였고, 1740년 정언(正言)으로 진출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사헌부장령으로 복귀하였다. 1742년 남혜로(南惠老)의 사건이 발생하자 그를 파직해야 한다는 소를 올리다 견책을 받아 장령에서 체직되었다가 복직되었다.
그 뒤 1745년부터 장령·헌납을 번갈아 맡았다가 교리 한광회(韓光會)의 탄핵으로 일시 파직되기도 했으며, 1757년에는 병조참의에 올라 영조가 친히 행한 문신전강(文臣殿講)에서 70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능히 경서(經書)를 외었으므로 특별히 녹피(鹿皮)가 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