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만우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부교리, 겸사서, 검상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계회(季會)
인물/전통 인물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671년(현종 12)
  • 사망 연도1722년(경종 2)
  • 본관풍산(豊山,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 주요 관직이조좌랑(吏曹佐郞)|부교리(副校理)|겸사서(兼司書)|검상(檢詳)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박홍갑
  • 최종수정 2025년 03월 27일
추헌유고 미디어 정보

추헌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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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부교리, 겸사서, 검상 등을 역임한 문신.

내용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회(季會). 이상(履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집(𫕱)이고, 아버지는 감사 주삼(柱三)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문량(李文諒)의 딸이다.

1701년(숙종 27)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09년(숙종 35) 사서로 근무 도중 사가독서(賜暇讀書)하는 은택을 입었고, 특히 시를 잘 써 호당(湖堂)에서 이름이 높았다. 1710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고향에 내려 가서 3삭(三朔) 동안 자리를 비웠다는 사헌부 탄핵으로 체차(遞差)되었다.

그 뒤 1713년(숙종 39)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홍문관부수찬에 제수되었고, 이어 수찬(修撰) · 교리(校理) 등을 역임했으나 1717년(숙종 43) 영남 유생(儒生)들의 파장(罷場) 등을 두둔하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이어 고묘(告廟)의 의견을 달리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 우의정 조태채(趙泰采) 등을 지척(指斥)하다 오히려 관작(官爵)을 삭탈(削奪)당하고, 정언(正言) 김려(金礪)의 탄핵으로 울산부(蔚山府)에 귀양갔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하자 다시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부름을 받았고, 이어 부교리(副校理) · 겸사서(兼司書) · 검상(檢詳) 등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 『숙종실록(肅宗實錄)』

  • - 『경종실록(景宗實錄)』

  • - 『순조실록(純祖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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