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아버지는 홍종하(洪鍾夏)이고, 어머니는 백주진(白周鎭)의 딸이다.
1777년(정조 1) 대사간에 올랐고, 1780년 홍충도관찰사(洪忠道觀察使)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제방을 소홀히 한 죄인 김제행(金齊行)의 불법을 비호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판(仕版: 벼슬아치의 명단)에서 삭거(削去)된 채 원주목(原州牧)에 정배(定配)되었다. 1년 후 방면되었다가 곧 대사간으로 발탁되었다.
이어 황해도관찰사, 대사간을 거쳐, 1787년(정조 11)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제수받았으나 황해감사 시절 평산(平山)지역의 살인에 대한 옥사(獄事)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잠시 삭직되었다.
이어 경상도관찰사로 제수되었으나 지난번 해서(海西)의 옥사(獄事)에서 교화(敎化)를 손상시킨 잘못이 제기되어 해임되었고, 대사성으로 제수되었다가도 이로 인해 곧 교체되었다. 1788년(정조 12) 비변사제조를 거쳐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파견되었다가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 뒤 대사성·대사헌 등을 거쳐 이조참판에 복귀하였으나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의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이어 1789년 대사헌·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이조참판에 재발탁되었으나 전관(銓官: 문무관의 인사 사무를 관장하는 이조·병조의 관원)의 인사원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