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광국(光國). 홍여량(洪汝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유수(洪有壽)이고, 아버지는 옥당 출신의 홍경렴(洪景濂)이며, 어머니는 조사문(趙嗣文)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11년 지평(持平)을 제수받았다가 교리 정식(鄭栻)의 탄핵 처치로 체직되었고, 1713년 문학(文學)을 거쳤다. 1717년 다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1722년(경종 2)경상도 지역의 고을 수재(守宰)로 재직하면서 경주부윤(慶州府尹) 권세항(權世恒)과 함께 유생들을 동원하여 이 지역에 있던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의 영당(影堂)을 철거하였다. 그러나 영조 즉위 당시 노론이 집권하자 경주지역 유생 채명보(蔡命寶) 등의 탄핵 상소로 삭출(削黜)당하였다.
1727년(영조 3) 헌납(獻納)으로 등용되었다. 이어 1731년에는 승지로 발탁되었으며, 이후 1734년 성균관을 비롯한 각 관서 액례(掖隷: 액정서 소속의 노비)의 급료(給料)를 줄인 것에 대해 승정원에서 직접 두량(斗量)을 검속한 것이 사리와 체면에 어긋난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736년 동의금부사(同義禁府事)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1738년에는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제수되었다가 2년 후 죽었다. 경연에서 홍문관 출신들이 『주역』의 문의를 잘 알지 못하자 대신 이를 강의하였고, 문신이면서도 활쏘기를 잘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