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대유(大有). 홍여량(洪汝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유수(洪有壽)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홍경렴(洪景濂)이며, 어머니는 조사문(趙嗣文)의 딸이다.
1712년(숙종 38) 성균관 상순(上旬)의 윤차과제(輪次課製)가 설행(設行)되자 수석하여 직부회시(直赴會試)하는 행운을 얻어 그 해 정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제수되어 이미 처형된 목호룡(睦虎龍) 이하의 잔존 세력들을 국안(鞫案)으로 처리하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어 헌납(獻納)으로 제수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장령으로 복귀하였다. 또한 진주사(陳奏使)로 파견되었다 돌아온 정사(正使) 전 우의정 심수현(沈壽賢), 부사(副使) 이명언(李明彦), 서장관(書狀官) 조진희(趙鎭禧) 등의 자문(咨文: 중국과 왕래하는 공문서)을 문제삼아 탄핵 배척하였고, 외방의 과장(科場)을 더욱 엄하게 하도록 진달하였다.
그 뒤 1728년 9월 장령으로 있으면서 당고(黨錮)의 폐단을 크게 논하는 소를 올렸고, 이듬해에는 효장묘(孝章墓)의 봉폐관(封閉官) 공으로 가자(加資)되었으나, 그 뒤 형률(刑律)을 마음대로 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