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박여(博汝). 홍서(洪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종만(洪宗萬)이고, 아버지는 홍윤(洪錀)이며, 어머니는 강준(姜준)의 딸이다.
1775년(영조 5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이어 세손이던 정조가 즉위하고 이를 지지하던 시파가 득세하게 되자 곧 과방(科榜)이 벽파의 사정(私情)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파방(罷榜)되었다.
그 뒤 이 사건을 두고 일어난 아우의 격쟁이 있자 1781년(정조 5) 헌납 윤장렬(尹長烈)이 벽파를 이끌다 제거된 윤양후(尹養厚)의 무리를 처벌해야 한다는 탄핵으로 가죄(加罪)되었다.
1792년에 소통되어 지평(持平)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전관(銓官)의 죄를 논박하다 명월만호(明月萬戶)로 좌천되었다가 치죄될 즈음 이내 팔순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사정으로 불서지전(不敍之典)만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1800년 순조 즉위 후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벽파가 다시 집권하자 지평으로 재등용되었고, 1803년(순조 4) 집의 이기경(李基慶), 사간 이동식(李東埴) 등과 함께 권유(權裕)를 탄핵하는 연명 소를 올렸다가 경상도 하동부(河東府)에 찬배되었고, 이듬해 방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