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열모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성립(聖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04년(순조 4)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풍산(豊山,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주요 관직
경상도관찰사|판의금부사|공조판서|한성부판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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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립(聖立). 홍감보(洪鑑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선호(洪善浩)이고, 아버지는 생원 홍희명(洪羲命)이며, 어머니는 김이중(金履中)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29년(순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33년(순조 33) 한권(翰圈)에 선발된 후 이어 시행된 한림소시(翰林召試)에 뽑혔다. 1836년(헌종 2) 도당록(都堂錄) 회권(會圈)에 선발되었고, 이듬해에는 원접사(遠接使)의 문례관(問禮官)으로 임무를 다하였다.

그 뒤 모사도감(摹寫都監)에서 도청(都廳)을 잘 수행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었고, 1848년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에는 대사성을 역임하였고, 1850년(철종 1)에는 상시(上謚) 때에 예방승지(禮房承旨)로 활약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 충청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가 곧 이조참판으로 복귀하였다. 1855년(철종 6) 희릉(禧陵) 친제(親祭)시 예방승지(禮房承旨)로 보필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었고, 도승지를 거쳐 예조판서·병조판서, 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한 뒤 1857년(철종 8)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예조판서로 재직 중 남전증건도감(南殿增建都監) 감동(監董)의 공으로 가자되었고, 이어 판의금부사, 공조판서·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거쳐 1862년(철종 13)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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