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사방 9.5m, 높이 3m의 크기로, 무덤으로 들어가는 왼편에 관리 사무소, 오른편에 창의사가 세워져 있다.
묘소는 입구 정면 중앙에 한단 높게 마련되어 있고 그 앞으로 상석과 함께 ‘丙午殉難義兵將士公墓碑’(병오순란의병장사공묘비)라고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두고 다투던 조선 말기인 1905년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홍주지역의 의병은 홍주(현 홍성) 문화권내의 의병항쟁으로서 1895(고종 32)∼1896년과 1906년의 2차에 걸쳐 전개된 활동을 말한다. 제1차 의병은 정부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 행위에 반대해 1895년 4월부터의 모병단계를 거쳐 단발령공포 직후 봉기하였다.
선구적 의병 봉기는 척왜분위기를 전국적으로 고조시켜 을미의병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제2차 의병은 1906년의 홍주성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 역시 수백 명이 산화해 의병전쟁사상 단일 전투로는 최대의 희생자를 내어 그 뒤 전국적인 의병항쟁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2차례에 걸친 의병항쟁으로 희생된 의병의 유해가 홍주천변과 남산 부근에 방치된 것을 1949년 홍성군민이 정성으로 지금의 의사총에 거두어 안장하였다. 1959년 정인보기(鄭寅普記), 심상직서(沈相直書)의 비문이 그 내용을 잘 말해준다.
창의사에는 이 때 희생된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본전은 건평 14.7평이고 삼문이 설치되어 있다. 900의총을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바꾸었다. 2001년 8월 17일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