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5년(숙종 21)에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인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
이곳에 서원을 세우게 된 것은 송시열이 병자호란 이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던 데다가, 특히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비례부동(非禮不動)’ 4자의 필적을 구하여 화양계곡의 암벽에 새겨놓고 친히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 각자(刻字)하여 존명대의(尊明大義)의 근본 도장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국에 걸쳐 44개소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 서원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곳이 되었다. 건립 당시부터도 첩설(疊設: 거듭 설치하다)이라는 소론(少論)측의 반대를 받아 중단될 뻔한 적이 있고, 사액을 받을 때도 예조에서 첩설서원이라 하여 방계(防啓)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그 때마다 노론측의 강경한 요구와 왕의 특별 배려로 허용되었다.
사액은 1696년 대사성 이여(李畲)가 경연에 입시한 틈을 타서 사액의 필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뒤 소론과의 당쟁에서 송시열이 노론측 정치 명분의 상징으로 추앙됨에 따라 이 서원은 노론 사림의 본거지가 되었다.
숙종 말년의 노론 집권시기에는 국가에서 유례없이 20결(結)의 토지와 많은 노비를 지급받았으나, 반면 경종 때 소론집권하에서는 없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영조 때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고 또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하여 국가에서 물질적 지원은 물론, 노론 관료나 유생들이 기증하여 서원 소속 토지가 크게 늘어나 강원도와 삼남 일대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 서원은 점차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가서 제수전(祭需錢) 징수를 빙자하여 각 고을에 보내는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가 때로는 관령(官令)을 능가할 정도였고, 이를 거부하는 수령에게는 통문(通文)을 보내어 돌려 쫓아내려고 하는 등의 행패를 자행하였다.
또 춘추 향사 때의 유생 공궤(供饋: 음식을 드리는 것)를 빙자하여 복주호(福酒戶)와 복주촌(福酒村)을 운영, 양민을 피역(避役: 부역을 피하는 것)시키면서 그 대가로 돈을 거두어들이며 이를 잘 따르지 않는 백성은 사형(私刑)을 가하는 등의 민폐를 심하게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폐습이 노론정권이 봐도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깊어지자, 1858년(철종 9)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에 의하여 복주촌은 영구히 폐지되었고, 지방관에 대한 징구(徵求)도 심한 통제를 받았다.
고종 때 대원군에 의한 서원·사우(祠宇: 따로 세운 사당집)의 철폐령이 내려지게 된 이면에도 실은 만동묘(萬東廟: 명나라 의종과 신종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조선시대 당시 청주 화양동에 있었음)와 함께 화양동서원의 폐단이 그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71년(고종 8) 노론 사림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폐되었고 묘정에 있던 비석은 일제강점기에 깨져 현재는 약간의 흔적만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