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군은 1216년 거란 유민과의 원림(原林)·개평(開平)·묵장(墨匠)·향산(香山) 전투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적군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최씨무신정권이 일반백성들의 적극적 협력을 받지 못하고 있던 중 거란 유민과의 전투는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되었다.
1217년 3월에 고려의 5군원수는 적병이 안주(安州 : 지금의 황해도 재령)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진격하다가 태조탄(太祖灘)에서 적의 급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 때 고려의 5군은 모두 무너져 대장군 이의유(李義儒)·백수정(白守貞)과 장군 이희주(李希柱)가 전사하고 병졸의 주검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물자·양곡·병기·의장도 모두 빼앗겼다. 오직 김취려(金就礪)부대의 활약만이 있었다.
정방보(鄭邦輔)와 조충(趙冲)까지 개경으로 달아나자, 태조와 세조(태조의 아버지)의 재궁(梓宮)을 봉은사(奉恩寺)로 옮기고 경성의 방어를 엄하게 하였다.
거란 유민군은 계속 남하의 기세를 늦추지 않았으니(5월), 조정은 최충헌(崔忠獻)의 건의에 따라 5군의 병마사를 개편해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 최원세(崔元世)를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임명하고, 상장군 김취려를 전군병마사에 임명해 거란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대장군 지윤심(池允深)으로 양광충청도방어사(楊廣忠淸道防禦使)를 삼아 도내의 병졸 및 승군으로써 적을 막게 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의 5군은 노원역(蘆元驛 : 지금의 서울 부근)의 선의장(宣義場)에서 적을 격파했고, 전군·우군 역시 양근(楊根 : 지금의 경기도 양평)·지평(砥平 : 지금의 경기도 양평)에서 적과 여러 차례 교전해 큰 전과를 올렸다.
5월 17일에는 거란 유민이 원주로 진입하자 그곳 주민들은 힘을 합해 적을 물리쳤다.
그러나 횡천(橫川 : 지금의 강원도 횡성)지역으로 물러나 있던 적들이 다시 원주를 아홉 차례나 공격하니, 주민들은 식량 고갈과 힘의 쇠잔, 지원결핍 등으로 결국 원주성을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 무렵 거란적은 또 안양도호부(安陽都護府 : 지금의 강원도 춘천)를 빼앗고, 안찰사 노주한(盧周翰)과 여러 관리들을 죽이는 등 갖은 살상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7월에 중군병마사 최원세와 전군병마사 김취려가 거란적을 황려현의 법천사(法泉寺)까지 추격해 맥곡(麥谷)에서 3백여 명을 죽이고, 제주(堤州 :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의 냇가까지 밀어내니 버려진 시체가 냇가를 덮어 흘러내리기까지 하는 등, 고려군의 대승이었다.
이 때의 대승은 김취려의 기각지세작전(掎角之勢作戰)이 주효한 것으로, 이는 김취려와 최원세가 적군을 양편으로 나누어 치는 작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