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산성 전투

  • 역사
  • 사건
  • 조선 후기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경상도 안음현 황석산성에서 조선이 일본군과 벌인 전투.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장희 (성균관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경상도 안음현 황석산성에서 조선이 일본군과 벌인 전투.

내용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병력을 총동원, 다시 조선을 공격하였다. 1597년(선조 30) 8월 16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 적의 맹장들은 황석산성에 도착, 수만의 군사로 성을 공략하였다.

당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황석산성이 호남과 영남의 길목이므로 일본군이 반드시 차지하려는 곳이라 여기고, 주위의 군사를 예속시켜 안음현감 곽준(郭䞭)에게 지키게 하였다. 이 때 적군이 공격해 오자 곽준은 성을 지킬 계책을 세우며 성을 보수하는 등 전력을 다하였다.

성 안에는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와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 등이 백성들과 합세해 성을 지킬 것을 굳게 결의하였다. 적들은 성을 포위해 가토는 남쪽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서쪽에서, 구로다는 동쪽에서 일제히 공격을 가하였다.

성 안에서는 곽준·조종도를 비롯한 장수들과 백성들이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적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적을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백사림은 가족을 성밖으로 피신시킨 뒤 성문을 열고 도망하였다. 그러나 곽준은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와 함께 끝까지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고전 끝에 성을 함락시키게 되자 성안을 수색하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뒤이어 일본군은 육십령(六十嶺)을 넘어 진안현을 거쳐 전주로 빠져 좌군과 합친 뒤 전주성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투는 비록 패하여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으나, 적으로부터 성을 지키고자 하는 백성들의 정신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 - 『선조실록(宣祖實錄)』

  •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임진전란사』(이경석, 임진전란사간행위원회, 1976)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