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흠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좌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경지(敬之)
인물/전통 인물
  • 본관창원(昌原)
  • 사망 연도1730년(영조 6)
  • 성별남성
  • 주요 관직좌우참찬|이조판서
  • 출생 연도1639년(인조 17)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조정기 (창원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기사계첩 중 황흠 초상 미디어 정보

기사계첩 중 황흠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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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좌우참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지(敬之). 황입중(黃立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형(黃泂)이고, 아버지는 황신구(黃藎耉)이며, 어머니는 김취겸(金就兼)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참봉으로 1680년(숙종 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이후 좌우참찬과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시장외제(試場外製)의 벌로 예조판서직에서 파면당하였고, 1713년(숙종 39)에는 한 해에 이조판서직에 임면되었다가 동시에 파면당하기도 하였다.

정사에 관여한 50여 년 동안 나름대로 소임을 다하여 3대(숙종·경종·영조)를 모셨다. 매사에 신중하였으며 청렴 검소하게 지냈으므로 헐뜯는 사람이 없었다.

1770년 임금이 대신들을 인견하는데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청렴하고 신중한 사람을 택한다면 현재로는 이선현(李宣顯) 한 사람이고, 선조(先朝) 때 옛 신하 중에서 구한다면 판서 황흠이 엄정하면서도 화목하고 정사도 공정하고 예의를 준수하는 청렴결백한 신하였다.”고 하였다. 90세를 넘겼으나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마지막 벼슬은 보국판돈녕(輔國判敦寧) 이조판서였다.

참고문헌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숙종실록(肅宗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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