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치상지의 생애와 활동을 기록해 무덤에 부장하였다. 크기는 세로 72㎝, 가로 71㎝로 정방형에 가깝다.
명문은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한자씩 새겨 넣었다. 그 제목이 ‘대주고좌무위위대장군 검교좌우림군 증좌옥금위대장군 연국공흑치부군묘지문 병서(大周故左武威衛大將軍檢校左羽林軍贈左玉錦衛大將軍燕國公黑齒府君墓誌文幷序)’이다.
총 41행으로 1행당 보통 41자씩 새겨져 있으며, 도합 1,604자이다.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찬자는 스스로 흑치상지와 같이 군문에 있으면서 그를 흠모했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글씨는 구양순체의 단정한 해서인데, 측천무후가 만든 별자(別字)가 종종 포함되어 있다. 제작시기는 흑치상지의 묘지가 성력(聖曆) 2년(699)에 이장(移葬)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699년으로 볼 수 있다.
이 묘지명의 출토경위는 최초의 소장자인 이근원(李根源)의 「곡석당지목(曲石唐志目)」이라는 해제에 어느 정도 밝혀져 있다. 그에 따르면 흑치상지묘지는 1929년 10월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망산(邙山)에서 아들인 흑치준(黑齒俊)의 그것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때 유골 2개체분과 한옥(漢玉) · 금은동기(金銀銅器) · 도와기(陶瓦器) 등의 부장품이 다수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서 대부분의 유물은 북경의 골동품상이 구입해 가버렸다. 다만, 흑치상지 부자의 묘지와 조각이 정교한 한옥 1점이 남아 있는 것을 1931년에 뤄양의 북망산 일대를 유력하던 이근원 자신이 구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출토정황에서 보면, 흑치상지와 흑치준 부자는 원래 북망산의 매우 근접한 곳에 묻혔다. 그런데 1929년을 전후해 두 무덤이 도굴꾼에 의해 동시에 파헤쳐졌고, 그 결과 묘지명도 출토되어 이근원에게 소장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이근원은 흑치상지묘지명과 같이 구입한 당대의 지석 93종을 강남의 소주로 옮겨 곡석정려장구십삼당지실(曲石精廬藏九十三唐志室)을 지어 보관하였다. 이때 탁본을 본 당대의 대학자였던 장태염(章太炎)이 흑치상지 부자 묘지명의 제발(題跋)을 쓰기도 하였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 이근원은 이를 소왕산의 산록에 있는 관제묘 앞의 작은 연못에 빠트려 무사할 수 있었다. 그 뒤 1945년 소주시문물보관위원회(蘇州市文物保管委員會)에 이를 기증하였다. 묘지를 다시 건져낸 소주시문물보관위원회는 남경박물원으로 옮겨 보관했으며, 현재도 그 곳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묘지명은 내용상 대략 여덟 개 단락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첫째 단락은 제(題)에 해당하는 것으로 흑치상지가 당에서 받은 관직과 훈작 및 추증된 관직이 보인다. 둘째 단락은 서의 첫머리로 그의 생평에 대한 평가를 개괄한 것이다.
셋째 단락은 그의 가문의 내력과 품성 및 수학에 대한 기록이다. 기왕의 사료나 백제사의 이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내용으로 백제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넷째 단락은 흑치상지의 백제와 당에서의 공훈과 역관에 대한 기록이다. 『신당서』 · 『구당서』나 『삼국사기』의 열전에 보이는 백제부흥운동과 관련한 활동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다섯째 단락은 입당 이후의 역관이나 공적이 수사적 칭송과 더불어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사망시 연령이 60세였음을 밝히고 있는 등 다른 자료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여섯째 단락은 그의 장자(長子)인 흑치준의 신원 요청과 허락의 제(制), 개장(改葬) 요청과 허락한 칙명 등으로 되어 있다. 일곱째 단락은 미괄(尾括)의 형식으로 찬자가 흑치상지의 일생을 칭송한 것으로 여기에 찬자의 신분을 시사하는 간략한 내용이 들어 있다. 여덟째 단락은 그의 인품과 생애 및 훈적을 운문 형식으로 노래한 명(銘)이다.
이 묘지명은 지금까지 알려진 각종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백제사 연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첫째, 흑치상지의 생애와 활동을 보다 자세하게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둘째, 흑치씨의 유래가 왕족 부여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백제 왕실의 분지화를 시사하고 있다.
셋째, 흑치상지 가문이 대대로 달솔에 머물고 있거나 그 자신 20세가 되기 전에 가문의 지위에 힘입어 달솔이 된 내용이 확인된다. 즉, 백제의 관등제도가 신분제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로써, 제1관등인 좌평과 제2관등인 달솔 사이에 신분적 계선이 그어져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넷째, 흑치상지가 수학기에 『춘추좌씨전』 · 『사기』 · 『한서』 · 『논어』 등의 경사서를 읽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백제 귀족의 학문적 소양에 대한 일반적 지견을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흑치상지의 역관이나 활동상을 통해 당의 백제고지(百濟故地)에 대한 통치책이나 당에 끌려간 백제유민의 대우와 행방 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