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왕족 부여씨(扶餘氏)에서 분파된 흑치씨(黑齒氏) 가문 출신이다. 증조부는 현덕(顯德 : 혹은 加亥), 조부는 사차(沙次 : 혹은 沙子)이며, 백제 멸망기의 장군으로 당나라에서 크게 활약한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아들이다.
무장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무략(武略)을 품었으며, 정기(旌旗)를 벌이거나 군진(軍陣)을 그리며 노는 등 무장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696년 약관(弱冠)의 나이로 양왕(梁王)이삼사(李三思)를 따라 이진충(李盡忠)의 난을 토벌하는 데 출전해 군공을 세웠다. 그래서 유격장군 행난주광무진장상주국(游擊將軍行蘭州廣武鎭將上柱國)을 제수받았다. 698년 선고(先考) 흑치상지의 무고함이 밝혀져 신원(伸寃)이 이루어져 추증을 받게 됨과 더불어 지금까지의 공로가 고려되어 우표도위익부좌랑장상주국(右豹韜衛翊府左郞將上柱國)에 임명되었다.
699년 당 고종에게 청해 아버지 흑치상지의 무덤을 뤄양(洛陽)의 망산(邙山)으로 이장해 그 혼령을 모셨다. 얼마 뒤에는 우금오위수익부중랑장상주국(右金吾衛守翊府中郞將上柱國)으로 옮겼다. 이후 평탄한 관료생활을 누리다가 706년 5월 31세를 일기로 뤄양현 사제(私第)에서 병으로 졸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아버지 흑치상지의 무덤 곁에 묻혔다.
1929년 뤄양 망산에서 그의 묘지명이 출토되었다. 그것이 1980년대에 세상에 알려지면서 비로소 그의 일생이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