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흑치가해(黑齒加亥). 백제 말기에 활동한 흑치상지(黑齒常之) 장군의 조부로서 백제의 제2관등인 달솔을 역임하였다.
흑치현덕에 대한 기록은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과 「흑치준묘지명(黑齒俊墓誌銘)」에서만 확인되는데, 두 자료가 이름을 다르게 적고 있다. 전자에는 ‘현덕(顯德)’으로 나오는데 비해 후자에는 ‘가해(加亥)’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두 묘지명의 찬자가 서로 다른 데서 나온 착오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아화(雅化)되어 있는 점에서, 그의 생존시에 가해에서 현덕으로 개명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흑치상지묘지명」에 따르면 흑치씨는 원래 왕족 부여씨(扶餘氏)였다가 흑치 지역에 분봉(分封)되었기 때문에 흑치를 씨(氏)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이는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흑치씨가 부여씨에서 분지(分枝)된 가문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들 자료에서 현덕은 달솔로서 자사(刺使)를 역임한 사실이 확인된다. 달솔은 정원 30명의 백제의 제2관등인데, 흑치씨 가문이 대대로 이를 역임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인 문대(文大)와 그 자신, 그리고 아들인 사차(沙次 : 혹은 沙子)와 손자인 상지(常之)에 이르기까지 모두 달솔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흑치씨 가문이 백제에서 제1관등인 좌평(佐平)까지 승진이 가능했던 왕족 부여씨나 대성팔족(大姓八族)과 같은 1급 귀족에는 미치지 못하는 차상급 귀족신분이었음을 알려준다.
한편, 「흑치준묘지명(黑齒俊墓誌銘)」에 따르면 백제에서 자사에 임명받았다고 되어 있다. 자사는 당나라의 관직으로 『신당서』흑치상지전에 따르면 백제의 군장(郡將)에 비정될 수 있으므로, 최종 관직이 백제의 지방관인 군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흑치현덕은 백제 제2급 귀족가문인 흑치씨 출신으로 백제의 군장이 최종 관직이었던 중하급 귀족관료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치활동 시기는 손자인 흑치상지의 활동 시점에서 미루어 보면 대략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로 추정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