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시 ()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함주, 흥남, 함흥 부분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함주, 흥남, 함흥 부분
인문지리
지명
함경남도 중부 해안에 있는 시.
정의
함경남도 중부 해안에 있는 시.
개관

동쪽과 서쪽은 함주군, 북쪽은 함주군·함흥시에 접하고, 남쪽은 동해에 면하여 있다. 동경 127°33′∼127°43′, 북위 39°47′∼39°54′에 위치하며, 면적 130㎢, 인구 약 20만 명(1944년 현재)이다.

하덕(荷德)·호남(湖南)·운하(雲下)·수변(洙邊)·신흥(新興)·운남(雲南)·인흥(仁興)·차인(車引)·창동(彰洞)·용연(龍淵)·용성(龍成成)·수동(水東)·궁서(宮西)·운상(雲上)·상수(上水)·운호(雲湖)··용암(龍巖)·용흥(龍興)·운흥(雲興)·흥덕(興德)·흥남(興南)·송호((松湖)·복흥(復興)·운중(雲中)·운성(雲城)·신성(新城)·구룡(九龍)·복흥(福興)·장흥(長興)·천기(天機)·응봉(鷹峰)·덕(德)·후농((厚農)·유정(柳亭)·동오(東吾)·송상(松上)·신상(新上)·서호(西湖)·작도(鵲島)·중흥(中興)·운동(雲洞)·마전(麻田)·대후(大厚)·동동도(東島)·서도(西島)·능하(陵荷)·풍서(豐西)·흥경(興慶)·흥상(興上)·서흥(西興)·능서(陵西)·농양(農陽)·신경(新慶)·동상(東上)·호북(湖北)·유전(杻田)·구탄(舊灘)·영대(營垈)·호상(湖上)·완풍(完豐)·송흥(松興)·대흥(大興)·송정(松亭)·송오(松塢)·신덕(新德)··수서(水西)·동변(東邊)·풍부(豐富)·상부(上富)·중수(中洙) 등 70개 이로 되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하덕리이다.

자연환경

북동쪽 함경산맥의 지맥이 시의 해안까지 뻗어 내려 북동부에 천주봉(天柱峰, 562m)이 솟아 있으며, 그 여맥이 서쪽의 호련천(瑚璉川) 연안까지 이르러 함흥시와의 경계를 이루고, 북부 중앙에는 응봉(鷹峰, 251m)이 솟아 있다. 동성천강(東城川江)이 호련천을 합치면서 서부를 남류하여 동해에 유입하며, 유역에는 넓은 함흥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해안에는 작도(鵲島)와 구경대(龜景臺)가 있으며, 구룡(九龍)해안에서 작도까지에는 사빈(沙濱)이 발달하였다. 앞바다에는 진동도(秦童島)·소진도(小陳島)·대진도(大陳島)·취도(鷲島)·양도(羊島) 등이 있다. 지질은 화강편마암계에 속한다.

기후는 배산임해형의 지세와 동해난류의 영향으로 같은 위도 상의 다른 지역보다 온난하다. 연평균 기온 10℃, 1월 평균 기온 -5.3℃, 8월 평균 기온 24℃, 연 강수량 900㎜이다.

역사

[고 대]

이 지역은 부족 국가 시대에 남옥저에 속하여 있다가 56년(태조왕 4)태조왕의 정복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며, 6세기 후반 신라 진흥왕의 정복에 의하여 신라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뒤에 발해가 건국되자 그 영역에 들었으며,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에 속하였다.

[고 려]

발해가 멸망한 뒤 이 지역에는 여진족(女眞族)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1107년(예종 2) 윤관(尹瓘)이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하여 함흥평야를 점령하고, 이듬해에 함주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와 구성(九城)을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고려의 영토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2년 뒤에 구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게 되어 다시 여진족의 거주 지역으로 되었다.

그 뒤 금(金)나라가 쇠망하면서 다시 고려의 영토로 회복되었다가, 몽고와의 전쟁 중이던 1258년(고종 45)에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가지고 몽고에 항복함으로써 화주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설치되고 이 지역은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뒤 1356년(공민왕 5)쌍성총관부가 회복됨에 따라 다시 고려의 영토가 되었으며, 함주에 속하였다.

[조 선]

1416년(태종 16)함주가 함흥부(咸興府)로 승격되고, 1470년(성종 1)함흥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509년(중종 4)에 다시 함흥부로 복구되는 동안 계속해서 그에 속하여 있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함흥부의 방리(方里)가 27사(社)로 나뉘어 있었는데, 지금의 흥남시 지역은 운전사(雲田社)였다. 운전사는 부의 동남쪽 30리 지점에 자리하고 한 면이 바다를 끼고 있으며, 호구는 753호 3,431인이었다.

[근 대]

1895년(고종 32)과 이듬해의 지방 제도 개편에서 운전사는 함흥부의 관할사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그 뒤 1910년 10월에 공포된 총독부 지방 관제에서 함흥부가 군으로, 그 아래의 사가 면으로 각각 개편되면서 운전사는 운전면으로 바뀌었다.

1930년 4월함흥면에 북주동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함흥부로 승격시키고, 함흥군의 나머지 지역을 함주군이라 개칭할 때 운전면의 일부와 남주동면을 합하여 운남면으로 하고 운전면의 나머지 일부를 흥남면으로 고침으로써 흥남이라는 지명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31년 10월 1일에는 흥남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함흥부는 예로부터 관북의 행정 중심지였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도시로서의 발전이 더디었다.

그러나 1914년 경원선 개통에 이어 1928년 함경선, 1936년 평원선이 완공됨에 따라 원산·서울·평양 및 함경북도까지의 교통이 편리해졌고, 1933년에는 함흥에서 장풍(長豐)에 이르는 함남선이 개통되어 장진·신흥군 고지대와의 물자 반출입이 활발해졌다.

이에 앞서 1929년에는 부전강수력발전소가 완공되어 이곳은 새로운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함남공업지대의 원동력이 되었다.

함흥부 동남쪽 12㎞ 지점에 있는 흥남은 운전사 또는 운전면이었을 때에는 동해에 면하여 있는 조그만 어촌에 지나지 않았으나, 함흥평야의 남부에 자리잡고 있어서 지대가 광활하고 전면에는 넓고 깊은 항구가 있으며, 배후에는 장진강·부전강·허천강 등과 같은 무한한 전력 공급원이 있는 데다가 교통이 편리하여 공업도시로 발달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27년 이곳에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의 공장이 들어서고, 이어서 부전강수력발전소의 완공과 더불어 흥남비료공장이 조업을 개시함에 따라 신흥 공업 도시로 약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고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읍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흥남 공장에서는 유안(硫安)·유린안(硫燐安)·과인산석회 배합비료 등 각종 화학비료를 생산하였으며, 연간 생산 능력은 60만t이 넘었고 종업원이 약 2만 명에 달하였다.

이 회사에는 이른바 5대 공장이라고 하여 흥남공장(질소비료)·금속공장·본궁공장(本宮工場, 조미료·의약품)·화약공장·연료공장 외에 용성기계제작소·흥남제련소와 같은 공장도 부속되어 있었다.

한편, 흥남항은 1만t급 2척, 3,000t급 4척, 1,500t급 7척이 동시에 정박할 수 있는 큰 규모로서 공장에 필요한 원료와 생산품의 대부분을 운송할 수 있었고, 또 서호항(西湖港)은 명태·청어를 비롯한 어물의 집산지로 유명하였는데, 특히 명태는 동해안에서 잡히는 어획량의 30%에 해당하는 연간 6만여 타(馱)에 달하여 수산물 제조업과 가공업이 성하였다.

인구는 1927년에 5만8077명이던 것이 1943년에는 16만5211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는 함흥부의 12만2760명보다도 훨씬 많은 것으로, 이곳이 신흥 공업 도시로서 급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도시의 급속한 발달과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 따라 흥남읍은 1944년 12월에 함주군 서호면 일부와 운남면·삼평면 일부를 병합하여 흥남부로 승격되었고, 1945년 광복 후에는 흥남시로 개편되었다.

유물·유적

궁서리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함흥본궁이 있다. 이 건축물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개수되었고, 6·25동란 때 다시 일부가 파괴되어 뒤에 복구해 놓은 것이다. 본궁 내에는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도조(度祖) 이춘(李椿)의 묘인 의릉(義陵)과 그의 비 경운왕후의 묘인 순릉(純陵)이 있다.

또한, 과거에 국보로 지정되었던 황초령 신라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 신라진흥왕순수비가 함주군 하기천면 진흥리 범박동과 이원군 동면 용산리에서 각각 옮겨 와 본궁의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의릉은 이성계가 왕이 된 뒤 1393년(태조 2)에 조성한 것으로, 능역을 3단으로 구분하여 봉분 주위에는 12개의 병풍석을 둘렀으며, 낮은 단 아래에는 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이 배치되고, 정자각(丁字閣)과 비각이 있으며, 이성계가 유년 시절에 격구하던 격구정도 있다.

비각에는 1393년에 세운 도조의릉비가 있는데, 비문은 금석문으로서 가치가 있으며, 돌과 금석을 병행하여 비문을 각자한 것은 비문 제작에 있어 희귀한 예이다. 의릉과 순릉은 관북팔릉(關北八陵)의 하나로도 유명하다.

시의 서부를 흐르는 동성천강 하류의 산기슭 평평한 곳에 있는 격구정(擊毬亭)은 이성계가 유년시절에 격구를 하던 장소로, 1674년(현종 15)에 관찰사 남구만(南九萬)이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 뒤 1836년(헌종 2)에 감사 이탄(李坦)이 개수하였으며, 1848년에 관찰사 박영원(朴永元)이 중수하였다.

옛날 이성계가 반룡산(盤龍山) 치마대(馳馬臺)에서 말을 달리며 활쏘기 연습을 하던 중, 격구정을 향하여 활을 쏘고 말이 먼저 달리기로 하고 도착하여 보니 활이 보이지 않아 말이 늦은 줄 알고 애마를 죽이자 그때서야 화살이 도착하였다고 한다. 이에 애마를 애석하게 여겨 뒷봉우리에 말을 매장하였으며, 현재 격구정 윗봉에 마총(馬塚)이 토석총의 형태로 남아 있다.

교육·문화

이 시는 본래 함주군에 속하여 있었으므로 조선 시대의 교육은 함주군과 함흥시의 교육기관에 의존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영흥향교와 함흥향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이 밖에 운전서원(雲田書院)이 있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운전에 4년제 초등학교인 중앙학교(中央學校)가 있었으며, 서호공립보통학교와 삼평공립보통학교가 있었다.

공업 도시로 발전하면서 공업 교육에 중점을 두어 1940년에 중등 교육기관인 흥남공업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뒤에 흥남공과대학이 되었다. 그 뒤 많은 학교들이 이 관내로 옮겨져 1945년 현재 흥남공업학교·함흥농업학교·함남상업학교·함흥중학교 등 중등학교와 초등학교 12개교가 있다.

또한, 공업 도시인 관계로 청소년 직공이 많아 정규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들을 위한 동광학원(東光學院) 등 7개의 학원이 있었다. 이는 초등학교 과정과 기술학교 과정 일부를 4년간 이수시키는 전수학교 격이었다.

산업·교통

농업은 경지면적이 작아서 생산량은 얼마 되지 않으나 함흥평야의 일부인 삼평평(三平坪)과 운전평(雲田坪)에서 논농사를 주로 하며, 산록 완사면에서 밭농사가 행하여져 소채류가 생산된다.

수산업은 서호진 앞바다에서 해류 관계로 명태·청어·대구·정어리 등의 어획이 많으며, 특히 명태는 동해안 어획고의 30%를 차지하여 생선은 국내에 판매하고, 건명태는 중국에, 명란은 일본과 중국에, 간유는 미국에 수출하였다.

제조업은 1927년 부전강과 장진강의 유로를 변경하여 동해 사면의 성천강에 낙하시켜 만든 유로 변경식 수력발전소의 완공과 조선질소비료공장의 건설로 우리 나라 최대의 공업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흥남과 본궁을 연결하는 공장 지대에서 유안·유린안·석회질소·합성 보석 등 20여 종의 생산품이 생산되었으며, 이 밖에 금속·기계·제련·화약·연료 공장 등이 건설되면서 당시 동양 최대의 공업 지대를 자랑하게 되었다.

상업 활동도 성황을 이루어 서호어시장과 신탄시장(薪炭市場)·흥남시장·구룡시장 등이 유명하였다. 교통은 함경선이 1928년에 개통되었으며, 함흥∼흥남 간 산업철도가 1933년에 개통되었다. 함흥∼서호진 간, 서호진∼연포 간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시의 동부 작도어항 동편 해안 낭떠러지에 있는 구경대(龜景臺)는, 정상에 오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아 아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동해의 해돋이를 바라볼 수 있어 명승지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격구정과 함께 성산10경(盛山十景)의 하나로 손꼽혀, 관찰사나 군수들이 동해의 일출을 조망하던 곳이다. 형태가 거북 등과 같아 구경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호진(西湖津)은 본래 동해의 한류와 난류가 교차되는 동북방 대어장의 수산물 집산항이었으나, 근래에 성장하는 함흥시와 이 시의 문호항으로 철도역이 있고 해상 화물의 집산항이 되어 큰 선박의 출입이 많다.

앞바다에는 대진도·소진도가 있고, 작도·구경대·조모자암(鳥帽子巖)·등대 등의 명승지가 있으며, 서쪽에는 통태진성지(通泰鎭城址)와 부근 솔밭에 격구정이 있다. 여름철에는 해수욕장으로도 이용된다.

광복 후 변천

광복 후 함흥부가 함흥시로, 흥남읍이 흥남시로 되었으며, 1960년 10월흥남시의 12개 이와 낙원군(당시 퇴조군)의 마전동 등 2개 이가 분리, 병합되어 함흥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함흥시 흥남구역으로 되었다.

그 후 1970년까지 일련의 변경을 거쳐 다시 함경남도에 속하여 도 소재지로 되었다. 1974년 1월 함주군의 일부와 덕산군이 편입되었다.→함흥시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증보문헌비고』
『함경남도지』(함경남도지편찬위원회, 1968)
『이북5도30년사』(이북5도위원회, 1981)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5)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조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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