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창선도(昌善島)에 해당하며 당시에는 흥선도라 하였다. 본래 삼국시대에 유질부곡(有疾部曲)이었으나 고려 때 창선현(彰善縣)으로 바꾸었다. 충선왕이 즉위한 뒤 왕의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같은 의미를 가진 흥선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태종 때 창선도리(昌善島里)로 직제를 고쳐 진주목관(晋州牧官)에 예속시켰고 임진왜란 후 말문리(末文里 : 지금의 사천시)에 속한 적이 있으나 곧 독립하였으며 1906년남해군에 이속되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이 섬은 왜구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고려 원종 때 왜구가 침입한다 하여 이곳에 소장하였던 국사(國史)를 진도(珍島)에 옮겼다.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적이 끊겨 주민들이 배로 내왕하면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세종 때 이곳에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어 섬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진주에서는 80리 거리이고 구라량(仇羅梁)으로는 10리의 물길이었다. 이 섬에는 목장이 설치되어 감목관(監牧官)이 파견되었으며 대방산(臺方山)에는 봉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