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으로 대덕구, 동쪽으로 충청북도 보은군과 옥천군, 남쪽으로 충청남도 금산군, 서쪽으로 중구와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7°24'∼127°33', 북위 36°11'∼36°25'이며, 면적은 136.67㎢, 인구는 23만 957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6개 행정동(45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대전광역시 동구 가오동에 위치해 있다.
동구는 식장산(食藏山)이 위치하여 동고서저의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구릉성 저지대에서는 수지상(樹枝狀) 수계를 나타내고 있다. 동구의 서쪽으로는 대전천이 중구와 경계를 이루고, 중북부 일대를 흐르는 대동천이 대전천으로 흘러든다. 그 밖에 가양동 일대를 흐르는 가양천, 판암동 일대를 흐르는 판암천이 대전천으로 유입된다. 하천 연변에는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되어 있고, 이 충적지와 분지 주변 산지 사이에는 경사가 매우 완만한 산록완사면이 넓게 발달되어 있다.
동구의 지질은 심층풍화된 화강암 분포지역이 대부분이다. 농경지는 도시발전과 산업시설의 증대로 인해 해마다 감소하고 있으며, 경지면적은 12.62㎢로 총면적의 약 9.2%에 해당한다.
대청호는 북쪽 회남교 부근에서 북쪽으로 흘러 호수를 이루고 있고, 소백산맥 자락인 계족산과 식장산에 둘러싸여 있다. 식장산에서 발원한 대동천과 만인산에서 흐르기 시작하는 대전천은 동구의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동구의 기후는 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어 같은 위도상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덜 받지만, 여름에는 북태평양으로부터 불어오는 기류의 영향으로 고온다습하며, 겨울에는 시베리아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기류의 영향을 받아 저온건조한 편이다. 여름의 강수량은 1년간 총 강수량의 55%를 차지하고, 겨울의 강수량은 매우 적은 편이다. 평균기온은 13.9℃이며, 1월 평균기온 -0.5℃, 8월 평균기온 25.9℃로 연교차가 27℃에 이른다. 강수량은 편차가 심해, 적을 때는 829㎜(2001년), 많을 때는 1,749㎜(2003년)를 기록한 적도 있으나, 보통 1,500㎜ 안팎이다.
동구 주변지역인 구즉동, 둔산동, 구성동 등에서는 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동구 지역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동구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백제 우술군(雨述郡), 통일신라시대에는 비풍군(比豊郡)에 속했고, 고려시대에는 공주목의 일부인 회덕군과 진잠현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으로 공주목 관할의 산내 부근과 청무목 관할의 세천 부근을 제외한 동구 지역 대부분이 회덕현 관할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1914년 3월 1일 실시된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종래의 회덕군, 진잠군, 공주군 일부가 통합된 대전군이 신설되었다. 현재의 동구 지역인 대전면은 대전군 관할이 되어, 현재의 인동, 원동, 중동, 정동, 삼성동 지역을 중심으로 설정되었다. 이때 설치된 대전군 대전면 지역은 이후 현 대전광역시의 모체가 되었다.
대전면은 1931년 4월 1일 대전읍으로 승격되었고, 그 해 6월 대전읍사무소가 현재의 원동으로 이전되었다. 대전부는 1940년 11월 1일 구역확장이 이루어져, 대덕군 외남면의 용운동, 자양동, 가양동, 성남동, 홍도동 지역이 추가 편입되어 32개 동이 되었다.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거치면서 대전은 대전천변 및 대전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교통의 요충지라는 이점을 살려 상업도시, 교통도시로 발전하였고, 동구 지역은 대전의 중요 지역으로 부각되었다.
1971년 7월 1일 동부출장소를 비롯한 4개 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7년 9월 1일 대전천을 경계로 동쪽에 동구를, 서쪽에 중구가 설치되었다. 또한 1983년 2월 대덕군 회덕면 전역이 동구에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종전의 대덕군 동면 일원과 산내면 낭월 · 대별 · 이사 · 대성 · 장척 · 소호 · 구도 · 삼괴 · 상소 · 하소리(里)가 동구에 편입되었다. 또한 동구의 오정 · 대화 · 읍내 · 신대 · 와 · 송촌 · 법 · 중리 · 비래동이 대덕구에 편입되면서 행정동 24개 동, 법정동 45개 동이 되어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1990년 8월 1일 홍도동 일부가 대덕구 오정동에 편입되었고, 1992년 9월 1일 판암동이 판암1·2동으로 분동되어 동구는 25개 행정동이 되었다. 1995년 1월 1일에는 대전직할시 동구가 대전광역시 동구로 명칭 변경되었다. 1998년 12월 14일 조직개편 때는 원 · 정 · 중동이 중앙동으로, 대신1· 신안동이 대신동으로, 추 · 세천동이 대청동으로 통폐합되었고, 대2동이 대동으로 명칭을 변경되었다.
또한 1999년 5월 4일 가양동 일부가 성남동으로, 홍도동 일부가 용전동으로, 용전동 일부가 가양동으로 편입되었다. 1999년 8월 6일 용전동 일부가 대덕구 중리동으로 편입되었고, 1999년 12월 5일 가양동 일부가 성남동으로 편입되었다. 2004년 7월 16일에는 판암동 일부가 가오동으로, 가오동 일부가 대청동으로 편입되었다.
유형문화유산은 송자대전판, 남간정사, 고산사 대웅전, 금암집판목, 심광사 목조석가모니불좌상, 고산사 목조석가모니불좌상, 고산사 아미타불화 등이 있다. 송자대전판은 1989년, 남간정사는 1989년, 고산사 대웅전은 1989년, 금암집판목은 1992년, 심광사 목조석가모니불좌상은 2001년, 고산사 목조석가모니불좌상은 2005년 지정, 고산사 아미타불화는 2005년에 전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무형유산은 매사냥, 여창가곡, 승무 등이 있다. 매사냥은 2000년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고, 여창가곡은 2002년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승무는 2004년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기념물에는 박팽년선생 유허(대전광역시 기념물, 1989년 지정), 능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 갈현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 삼정동 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 노고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1년 지정), 견두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1년 지정), 고봉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1년 지정), 백골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1년 지정), 계현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1년 지정), 비파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1년 지정), 성치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3년 지정), 마산동 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3년 지정), 신선봉 유적(대전광역시 기념물, 1995년 지정), 미륵원지(대전광역시 기념물, 2005년 지정) 등이 있다.
문화유산자료는 삼매당, 문충사, 박팽년선생 유허비, 김정선생 묘소 일원, 월송재, 은진송씨 승지공파 재실, 관동묘려, 송자 고택, 박원상의 묘, 서포 김만중 영정, 삼성초등학교 구 교사 등이 있다. 독립지사 김태원 생가 유허는 1997년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가 2015년 지정 해제되었다. 삼매당은 1989년, 문충사는 1989년, 박팽년선생 유허비는 1989년, 김정선생 묘소 일원은 1991년, 월송재는 1992년, 은진송씨 승지공파 재실은 1992년, 관동묘려는 1994년, 송자 고택은 1995년, 박원상의 묘는 2000년, 서포 김만중 영정은 2001년, 삼성초등학교 구 교사는 2002년에 전부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등록유산은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 구 조흥은행 대전지점,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한국전력공사 대전 보급소, 구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보급창고 3호 등이 있다.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은 2002년, 구 조흥은행 대전지점은 2002년,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은 2004년, 한국전력공사 대전 보급소는 2004년, 구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보급창고 3호는 2005년에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동구의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3개교, 중학교 12개교, 고등학교 9개교, 특수학교 2개교가 있으며, 한국폴리텍4대학 대전캠퍼스, 대전대학교, 우송대학교, 우송정보대학, 우송공업대학, 대전보건대학 등 7개 대학이 있다.
의료시설로는 종합병원, 병원, 의원, 치과병(의)원, 한방병(의)원, 보건소가 있다. 사회복지관으로는 대동종합사회복지관, 산내종합사회복지관, 생명종합사회복지관, 판암사회복지관 등이 있으며, 동구청소년자연수련관 등을 비롯하여 아동, 노인, 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문화공간으로는 지상 3층, 1,300석의 관람석을 갖춘 우송예술회관과 2002년 1,400여 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8개 관으로 증축 운영 중인 대전아카데미극장이 있다. 전시공간으로는 2001년 개관한 동구문화갤러리가 있으며, 대전보건대학박물관, 대전대학교박물관, 한밭교육박물관 등이 있다. 도서관은 용운도서관, 가오도서관, 문화정보관, 판암도서관, 성남도서관 등이 운영 중이며, 체육시설로는 가양시민체육공원을 비롯하여 고산사 · 대별동 · 판암1동 체육공원, 세천체육공원 등이 있다.
대전역, 원동4가, 대흥교, 홍명상가를 잇는 3만 평 부지의 중앙재래시장은 중부권 최대의 재래시장이다. 8개의 상설시장과 2개의 대형할인점, 귀금속거리와 먹자골목 등 2개의 거리형 시장, 기타 잡화 등을 판매하는 노점상, 먹자골목, 생선, 의류, 홈 패션, 그릇, 기물, 수입상품, 화장품, 중고서적, 미싱, 군용품 판매점 등 약 4,200여 개의 점포가 어울려 있다.
원동 하나은행과 중앙종합시장 그리고 혼수타운을 잇는 약 300m의 거리에는 160여 개의 한복 도소매업소와 120여 개의 한복 제조 및 수선 업소가 자리한 한복거리가 있다. 또한 정동 · 중동 · 삼성동에 걸쳐 있는 인쇄거리, 대전역 부근 중앙로에 자리 잡고 있는 중앙동 한의약거리, 원동 사거리를 기점으로 인동4가와 효동4가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있는 건설건축자재거리 등 각종 특화거리가 동구 지역 곳곳에 조성되어 있다.
사매를 길들여 꿩이나 토끼 등을 잡는 매사냥은 인도에서 기원하였다는 설이 있을 만큼 인도 지역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에도 기록이 있으며, 중국에서는 원나라 때 유행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매사냥이 성행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매사냥 그림이 있으며,『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에도 매사냥 기록이 남아 있다.
매사냥은 특히 귀족층 사이에서 성행하였는데, 고려 충렬왕 때는 매의 사육과 매사냥을 담당하는 관청인 응방(鷹坊)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현재 매사냥은 대전광역시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구 이사동에 한국전통 매사냥 보전회가 위치해 있다.
동광교는 대동교에서 남쪽으로 30m 정도 떨어진 상류에 위치한 교량으로, 현재의 대동교를 대신했던 일제강점기에 축조된 낡은 교량이다. 화강암으로 된 푯말에는 ‘소화 3년’이라 새겨져있어, 이 다리를 축조한 것이 1928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 노인들에 의하면, 당시 동광교는 이 부근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현대식 교량으로, 옥천에서 판다리(판암동의 옛 이름)를 거쳐 회덕의 서원진 나루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광교는 새여울(신탄진)을 경유하여 청주로 가는 길손들이 거쳐가는 중간지점이었는데, 다리의 양옆 거리에는 주막이 줄지어 있었다. 또한 다리 옆에는 정자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항상 들마루가 놓여 있어 이곳은 행인들이 언제든 여독을 풀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용운동에서 대전대학교로 가는 도로 중간지점에는 남장승이 서있다. 그리고 그와 맞은편 용운 고층 아파트 밑에는 여장승이 서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본래 장승 옆에는 돌로 쌓아 올린 탑이 함께 있어 주민들로부터 치성을 받아 왔는데, 1970년대 초 도로를 넓히면서 탑은 소실되었고 장승만 남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도 장승을 탑이라 부르고, 장승에 대한 제의를 탑제라고 칭하고 있다.
소제동에서는 매년 정월 열나흘 날 저녁, 마을의 편안과 각 가정의 만복을 비는 거리제가 열린다. 거리제는 소제동 작은 제방에 있는 영감장승과 장승에서 서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칠갑교 옆의 할매장승 앞에서 지낸다.
이곳은 송시열이 집을 짓고 살았던 지역이었는데, 보문산은 여자가 옷을 벗고 누워있는 형국이므로 마을의 잦은 질병과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흉한 모습이 보이는 소제마을 앞에 장승을 세워야 한다는 송시열의 의견에 따라 이 자리에 장승이 서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거리제 2∼3일 전부터는 장승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금줄과 황토를 이용해 부정을 막는다. 제를 지내는 날에는 저녁 무렵, 날이 어두워지면 풍장을 치고 나와, 할배장승과 할매장승 각각에 제물을 진설하고, 할배장승에는 소제동장이, 할매장승에는 노인회장이 또는 마을에서 선출된 사람이 제관이 되어 동시에 거리제를 지낸다.
한편 추동은 계족산성, 백골산성, 노고산성, 고봉산성 등이 인접해 있는 지역으로 ‘대청호반 정월대보름 민속행사’가 열린다. 행사는 정월 초이레부터 시작하여 열사흘까지 펼치는데, 걸립풍장놀이, 당제 길잡이와 뒷풀이, 달불놀이 등이 벌어진다.
이밖에 정월대보름에 거행한 민속행사로, 말미마을(현 마산동)에서는 느티나무 신목(神木) 앞에서 칠성제를 지냈으며, 은골(현 마산동)은 당집 앞에서 당신제를, 비룡동은 석장승 앞에서 농신제를, 용지마을(용계동)은 못과 공동우물 앞에서 용왕제를 지냈다. 하지만 이 행사들은 대청호 수몰로 맥이 끊기게 되었다. 다만 현재는 비룡동 농신제만이 이어져, 정월 대보름 자시(子時)에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여 생산과 번식의 풍요를 비는 행사로 남게 되었다.
동구의 설화로는 식장산 산기슭 마을과 관련된 가오리의 은어송,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된 용계동 용지말의 고목과 산삼, 내탑동 금강변 금강의 탑산, 식장산에 관련된 설화 등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떡갈봉, 장승제의 유래, 어부동의 성가족, 배말의 작은 샘, 소제방죽, 범바위, 신선바위, 학이 날아간 학고개 등의 설화도 전해져 오고 있다.
여창가곡은 관현악(絲竹) 반주에 맞추어 시조시를 노래하는 우리의 전통 음악으로 판소리, 범패와 함께 한국의 중요 성악 장르 중 하나이다. 인간의 목소리와 사죽의 느릿한 어우러짐은 엄격한 절제미를 보여준다. 완벽한 음악적 구성뿐만 아니라 탁월한 예술성을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식자층이 즐겨 듣고 부르던 가곡은 고려시대의 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곡은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시조시를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 부른다. 사죽은 대금, 세피리, 해금, 거문고, 가야금, 장고 등으로 이루어지며, 때로는 양금이나 단소 등이 더해지기도 한다. 우조(羽調), 계면조(界面調), 반우반계(半羽半界) 등으로 짜여진 가곡은 16박의 기본장단 혹은 10박의 편장단에 맞춰 남자 또는 여자가 혼자 부르기도 하고, 남녀가 한자리에서 번갈아 부르기도 하며, 남녀가 함께 부르기도 한다. 현존하는 가곡은 남창 26곡, 여창 15곡이다.
동구는 대전역을 중심으로 교통이 편리하여 상업이 발달된 곳이다. 사업체 수는 1만 8608개로 전체 사업체 중 도매 및 소매업(28.5%)과 숙박 및 음식점업(17.2%)이 절반 가까이 되며, 운수업(12.7%), 기타 공공 및 개인 서비스업(11.5%)이 뒤를 잇고 있다.
농업특산물로는 포도가 유명하며, 재배면적은 268㏊로 640여 개의 농가가 산내, 판암동 지역을 중심으로 위치해 있다.
중동과 정동에는 한약전 · 인쇄촌거리가 있고, 원동의 한복점, 공구상가 등이 있으며, 값이 저렴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중앙시장 등이 있다.
또한 대전역을 중심으로 청과물시장 · 농협공판장 · 농수산물센터 · 중앙시장 · 홍인시장 · 동대전상가 · 대전상가 등이 있고, 대전천 연변에는 홍명상가 · 신도상가 · 대전백화점 등이 들어서 있다.
한편 공업은 경부고속도로 대전 인터체인지에 인접하여 일찍부터 발달하였는데, 피혁 · 직물 · 제지 등의 공업이 소규모 공업단지의 양상을 띠고 산재해 있다.
최근 신시가지 조성으로 도심 기능이 점차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지만, 대전 · 진주 간 고속도로는 물론 남부순환도로가 동구 지역을 관통하고 있고, 경부고속철도 개통으로 경부고속전철 역사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등 여전히 대전 교통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식장산은 대전 8경 가운데 하나로, 기슭에 유서 깊은 고산사, 구절사, 개심사 등의 사찰이 있으며, 대청댐 건설 이전 대전 지역의 중요한 상수원이었던 세천저수지가 있다.
세천유원지는 매년 4월이면 벚꽃이 만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또한 식장산 산내 패러글라이딩 교육장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호수인 대청댐 역시 대전 8경의 하나로 금강 줄기와 호 안에 있는 여러 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 금산군의 경계지점인 만인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만인산 자연휴양림은 산세가 매우 수려하고, 대전천의 발원지인 봉수레미골 등 아름다운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다. 이 휴양림은 자연 능선을 이용하여 숲 속의 교실, 삼림욕장, 가족휴양지구, 푸른학습원, 야영장, 체력단련장, 휴게소, 정자, 피크닉장, 등산로 등을 갖추고 있다. 또한 도시 근교에 위치해 도시민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어 친근하고 쾌적한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북쪽으로는 용전동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질티고개 너머 대청동과 접경을 이루며, 남쪽으로는 자양동 · 소제동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성남동과 경계를 이룬다.
동구 지역은 백제 때 우술군, 통일신라 때 비풍군에 속했으며, 고려 초기에는 회덕현에 속했다가, 1018년(현종 9) 이후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 초기인 1413년(태종 13) 공주군 관할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이후 회덕군 관할이 되었다.
가양동의 명칭은 괭잇들 가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괭이 또는 가양(佳陽)이라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매봉리(梅峰里) · 원리(院里) · 탁곤리(卓昆里)와 내남면의 송촌(宋村) 일부가 병합되어 갱이의 이름을 따 가양리(佳陽理)가 되었고, 대전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에는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 외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40년 11월부터 대전부 가양정(佳陽町)이라 부르게 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가양동이 되었으며, 1982년 9월 1일 분동되어 가양1동(佳陽1洞)이 되었다.
고속도로 진입로 변에 위치한 대전의 관문으로 구획이 정리된 단독주택 및 빌라 지역이 많다. 동구에서는 네 번째로 인구규모가 큰 동으로, 최근 노령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 외남면에 편입되면서 매봉 · 원 · 탁곤리와 내남면의 송촌(宋村) 일부가 병합되어 가양리(佳陽里)라 하였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40년 11월 대전부 가양정(佳陽町)이 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일본식 동명(洞名) 변경에 따라 가양동(佳陽洞)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대전시 동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82년 9월 1일 분동되어 가양2동이 되었다.
가양2동은 북쪽으로는 대덕구 비래동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대청동, 자양동과 인접한 지역으로 계족산이 휘돌아 능선을 이루고 있어, 아늑하고 편안한 지형적 특성을 보여준다.
대전IC, 고속버스터미널이 근접한 교통의 중심지로 우암사적공원, 박팽년 유가 등의 문화유적과 한국폴리텍Ⅳ대학, 보건대가 위치하고 있으며, 계족산과 문화유적이 어우러진 주거지역이다.
대전광역시 동구의 서쪽에 위치하여 동쪽으로는 용운동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신안동과 소제동에 접하며, 남쪽으로는 대동천을 건너 신흥동, 북쪽으로는 자양동과 경계를 이룬다.
대동은 1914년 대전군에 편입되면서, 신안리 · 하신리 · 소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였고, 1931년 대전읍 대동정이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동구 대2동,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동구 대2동을 거쳐 1998년 12월 16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대동으로 명칭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동이라는 명칭은 대동교 동쪽 현재의 대동오거리 부근에 있었던 한밭들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생기게 되었다. 대동마을은 조선시대 큰 길이 있었던 대동천 안쪽에 위치한 마을로,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에는 자양천과 대동천이 흘러 수원은 풍부한 편이었으나 냇물이 반듯하고, 급류였기 때문에 비가 올 때마다 범람하여 자주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대동은 일부 상가 지역과 일반 거주 지역으로 구분되며, 도시철도 개통과 역세권 개발이 가시화로 지역 경제 활성화가 기대되고 있는 지역이다.
대신동은 대동5거리를 중심으로 명실상부한 대전 동부 지역의 교통 중심지이며, 전통문화의 계승 · 발전과 주민화합을 위한 장승제 봉행 등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져 주민의 결속이 강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명칭은 태전(太田) 동쪽에 있어 대동리(大東里)라 칭하게 되었다. 또한 신안동은 새터 또는 신대리(新垈里)라 하였다.
대신동은 대동 일부와 신안동이 통합된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에 편입되면서, 신안리, 하신리, 소재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대동이 되었고, 대동리, 정포리 각 일부가 병합되어 신안동이 되었다. 이후 1931년 읍제 실시에 의해 대전읍에 편입되어 대동은 대동정, 신안동은 동정(東町)이라 하게 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일본식 동명 변경에 의해 대동정과 동정이 대동, 신안동으로 개칭되었다. 1970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대동은 대1동과 대2동으로 분리되었고, 1998년 12월 14일 소규모 행정동 통 · 폐합에 따라 대1동과 신안동이 대신동으로 통합되었다.
현재 대신동에는 신안동파출소, 대자양우편취급소 등의 공공기관과 신안간도교양수장 등이 위치해 있다.
북쪽으로는 대청호를 끼고 대덕구 신탄진동 · 보은군 회남면과 접경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꽃봉과 꾀꼬리봉 등이 솟아 있어 옥천군 군북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질타고개 너머 가양동, 대덕구 회덕동과 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성재산과 그 연봉이 대덕구 회덕동 · 신탄진동과 접경을 이루는 대청호를 둘러싸고 솟아 있다. 이 지역은 대청호의 수원을 보호하기 위해 대부분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회덕군(회덕현) 일도면 구역인 마산 · 효평 · 직동 · 세천 · 비룡 · 주산 · 신상 · 신하 · 용계 등 9개 리와 주안면 구역인 사성 · 내탑 · 주촌 · 오동 · 추동 · 신촌 등 6개 리가 대전군 동면으로 편입되었고, 1935년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되고 대전군이 폐지되면서, 신설된 대덕군 동면으로 편입되었다.
1989년 대전시가 대전직할시로 승격될 때, 동구에 편입되어 리가 동으로 고쳐졌고, 추동(秋洞)에 비룡(飛龍) · 주산(注山) · 용계(龍溪) · 마산(馬山) · 효평(孝坪) · 직동(稷洞)의 6개 동이 통합되었고, 세천동(細川洞)에 신하(新下) · 신상(新上) · 신촌(新村) · 사성(沙城) · 내탑(內塔) · 오동(梧洞) · 주촌(周村)의 7개 동이 통합되었다. 이후 1998년 추동과 세천동이 통합되어 현재의 명칭인 대청동이 되었다.
행정동인 대청동은 법정동인 추동 · 비룡동 · 주산동 · 마산동 · 용계동 · 효평동 · 직동 · 세천동 · 신하동 · 신상동 · 신촌동 · 사성동 · 내탑동 · 오동 · 주촌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어 많은 지역이 대청호 속에 잠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마을이 폐동 되어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며, 번화가는 세천동을 관통하는 대전~충북 옥천 간 국도변에 집중되어 있다.
현재 대청동에는 추동파출소, 세천동파출소, 추동우체국, 추동보건지소, 세천보건진료소 등의 공공기관이 있으며, 세천어린이 공원, 세천저수지, 경부선 철도 세천역이 위치해 있다.
남쪽으로는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서쪽으로는 대전광역시 중구와 접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외남면의 대별리 일부와 응전리를 병합하여 구도리라 하고, 대전군 산내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에 편입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산내동이며 10개의 법정동이 있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90%로 크며, 번화가는 대성동 · 남월동 · 이사동의 중앙부를 관통하는 국도변에 집중되어 있다. 산내소방파출소, 대전실전실습장, 동구청소년자연수련관 등이 위치해 있다. 주요 간선도로로는 중앙부를 관통하는 대전-금산 · 전북 진안 국도가 있고,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가 있다.
삼성동에 사람이 살기 시작 한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쪽의 만인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대전천과 식장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대동천이 삼성동에서 합류되어 예로부터 수원이 풍부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농경문화가 발달하였으며, 현재의 계룡공고 주변(옛 지명 솔랑산)에서 백제시대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었다.
삼성동 지역은 1914년 대전군 대전면에 편입되었고, 1931년 대전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영정삼정목(榮町三丁目)으로 불리다가, 1936년 현재의 동명인 삼성동(三省洞)으로 개칭되었다. 삼성동은 이후 1970년 7월 1일 삼성1·2동으로 분동되었다.
대전천과 대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예로부터 검은 바위가 많아 검배 또는 현암이라 불렸으며, 삼성로, 동서로 및 하상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1914년 대전군 대전면 관할이 되었고, 1970년 7월 1일 삼성동, 선화동, 중촌동, 성남동 일부를 편입하고, 삼성2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대전광역시 동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은 잔잔한 야산지대가 많고, 남쪽으로는 대동천이 흐르고 있다. 번창해가는 대전역전의 시가지와 그리 멀지 않은 지역이었으나, 의외로 개발이 늦어진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가양1동 접하고, 서쪽으로는 홍도동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삼성동, 북쪽으로는 용전동과 경계를 이룬다.
성남동 지역은 예부터 효자, 효부가 많은 지역이라 하여 연효리(連孝里)라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 외남면 관할로, 솔랑리(率朗里) · 영장리(迎長里)와 소제리(蘇堤里) · 수침리(水砧里) · 홍도리(弘道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였고, 명칭을 연효리로 하였다. 그 후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 외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40년 대전부 구역 확장에 따라 대전부에 편입되어 성남정(城南町)이 되었다.
해방 후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성남동(城南洞)이 되었고, 1970년 7월 1일 분동되어 성남1동이 되었다. 이후 1995년 1월 1일 대전이 직할시에서 광역시로 승격되어,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1동으로 행정구역명이 개편되었다.
동쪽으로는 가양동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홍도동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삼성동, 북쪽으로는 용전동과 경계를 이룬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장리, 소제리, 수침리, 홍도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연효리가 되었고,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대전부 구역 확장에 따라 대전부에 편입되어 성남정이라 하다가, 광복 후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의해 성남동이 되었다.
그 후 1970년 분동되어 성남2동이 되었고, 1995년 대전직할시의 광역시 승격에 따라 대전광역시 동구 성남2동으로 행정구역명이 개편되었다.
동구의 중서부 시가지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삼성동 · 가양동과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대동천이 흘러 대동 · 자양동과 자연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는 신안동, 서쪽으로는 경부선 철도를 경계로 정동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소제동 지역은 예부터 중국 소(蘇) 나라와 맞먹는 경치라는 뜻으로, 소제호(蘇堤湖)에 연유해 소제(蘇堤)라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 외남면에 편입되면서, 동강리(東江里), 성동리(性洞里), 탁곤리(卓昆里), 대동리(大洞里), 소제(蘇堤)의 각 일부를 병합해 소제리라 칭하게 되었다. 그 후 1935년 대전부제 실시에 의하여 소제정이라 하고 대전부에 편입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소제동이 되었다.
1928년 대전 도시계획사업 실시로 소제 방죽도 메워지고 도시형 시가지가 조성되어 농경지는 모두 주택지나 철도부지 등으로 바뀌어 없어졌다. 번화가는 대전역 앞 동쪽 도로변에 있다. 소제동파출소, 소제동우체국 등의 공공기관이 위치해 있다.
동구 중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대동 · 신안동에 인접해 있고, 동쪽 구릉지 너머로는 판암동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인동 · 효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신안동 · 원동 · 인동과 경부선 철도를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은 예부터 새롭게 마을이 생겼다 하여 새터말, 신대(新垈)라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 대전면 신대리라고 하였다가, 1935년 신설된 대전부에 편입되어 육정이라 하였다. 1946년 광복과 더불어 일본식 동명이 개칭되어 신흥동(新興洞)이 되었다.
주거에 비하여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낮은 편이었지만, 1970년 이후 택지가 개발되어 임야는 주택이나 아파트 · 시장 · 공장 부지가 되었다. 번화가는 서남쪽 충무로 변에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대전~옥천 · 청주 간 국도가 있다.
대전대학교가 위치하고 있으며, 다양한 인구분포로 어우러진 도농복합지역이다.
용운동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선량리, 모오리, 초동을 병합한 후 용방리라 하여 대전군 외남면에 편입되었고, 1935년 11월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에는 대전부 구역 확장에 따라 대전부에 편입되어 용운정이라 하였고,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의해 용운동으로 개칭되어 대전시 동구에 속하게 되었다. 1971년 대전시의 출장소 설치에 따라 동부출장소 관할 구역이 되었고, 1977년 구제 실시로 동구에 편입되어 대전광역시 동구 용운동이 되었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며, 번화가는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도로변에 있다. 용운동파출소, 용운소방파출소, 대전대학우체국, 용운아파트 우편취급소, 동구용운도서관 등의 공공기관과 대전대학교가 위치해 있다.
동구의 중북부 구릉 지역으로, 북쪽에 갈고개가 있어 비룡동 · 세천동과 접경을 이루고, 남쪽 구릉을 넘어 판암동과 인접해 있다. 동쪽에는 성재가 있어 판암동 · 삼정동과 경계가 되며, 서쪽으로는 자양동 · 대동과 인접해 있다.
용전동 지역은 예부터 용밭 또는 용전(龍田)이라 불렸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내남면(內南面)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11월 1일 대전부에 편입되었고, 일부는 회덕면에 편입되었다. 1969년 1월 1일 대전시 구역 확장에 따라 대전시에 편입되면서 용전동(龍田洞)으로 명명되어 오다가 1979년 5월 1일 행정구역 변경으로 가양동(佳陽洞)에서 분동되어, 현재와 같이 대전광역시 동구 용전동이 되었다.
고속버스터미널과 동부시외버스터미널이 위치하고 있는 대전의 관문이며, 다양한 인구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유동인구가 많다. 터미널을 중심으로 여관 및 각종 유흥업소 밀집지역으로서 행정 및 치안 수요가 많은 지역이다.
동구 서북단에 위치한 도심지역으로, 북쪽으로는 원동 · 신안동에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효동 · 판암동과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는 대전천을 경계로 중구의 문창동과 인접하고 있다. 동남쪽으로는 효동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대전천이 흘러 중구의 문창동 · 대흥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전역에서 남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인동은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 발달한 대전의 발상지이다.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장터라고 전해지는 인동시장은 가마니와 쌀 시장으로 전국에 유명세를 떨쳤던 곳으로, 과거 대전 3·1독립만세운동의 거점지역으로 1919년 3월 16일 대전 지역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
인동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 대전면에 편입되면서 회덕군 외남면 정포리(井浦里) 일부를 병합해 본정2정목(本町二町目)으로 불렸다. 해방과 더불어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인동(仁洞)이 되었고, 동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부터 대전직할시의 광역시 승격과 함께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20년경 도시계획사업으로 직교형 도로망을 갖춘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인동과 지금의 중앙동 일대 대부분 지역을 일본인들이 점거하여 일본풍의 상가를 이루었고, 우리나라 상인들은 한밭장(대전시장)을 중심으로 상업 활동을 하는 등 대전 상업의 중심지였고, 이후 현대화 과정을 거치며 곳곳에 상설시장과 대형 백화점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동구의 중북부 지역으로, 동북부는 구릉성 야산 지역이고, 서남부는 시가지로 조성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가양동에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구릉 너머 용운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대동과 접경을 이루고, 서쪽은 대동천을 경계로 소제동 · 삼성동에 인접해 있다.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주거지역으로 우송대학교를 비롯한 9개의 교육기관이 있으며, 동구 유일의 공연장인 우송예술회관이 자리하고 있어, 지역 문화와 교육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유동인구가 많고, 자양로를 중심으로 동쪽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으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요식업, 유기장업 등 각종 서비스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자양동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탁곤리에 속하여 대전군 외남면의 지역이 되었다. 그 후 1935년 11월 1일 대전부에 편입되어 신설되는 자양정(紫陽町)이 되었고, 1946년 일본식 동명 개칭에 따라 자양동이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전직할시 동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95년 대전의 광역시 승격과 함께 대전광역시 동구 자양동이 되었다.
동구 중서부의 도심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삼성동 · 소제동과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경부선 철도를 경계로 신안동 · 신흥동 · 자양동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서남쪽으로는 대전천이 흘러 중구의 은행동 · 대흥동과 자연 경계를 이루고, 동남쪽으로는 효동과 인접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 대전면에 편입되어, 태전리 일부와 회덕군 외남면 수침리, 소제리, 하신리, 각 일부를 병합하였다가, 해방과 더불어 1946년 일본식 동명 개칭 때 지금의 원동(元洞), 정동(貞洞), 중동(中洞)이 되었다.
이 지역은 지난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으로 대전역이 들어서면서 인적 · 물적 교류가 빈번한 신흥도시로 출발해, 현재도 경부고속철도 개통 등 대전 교통의 요충지로 거듭 부상하고 있다.
아울러 중앙로를 기점으로 동 · 서로 시장 및 상가가 형성되면서 행정 · 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등 대전 발전의 모태가 되었던 지역이다. 경부고속철도 개통과 관련한 역세권 개발의 중추 지역은 물론, 동서 관통도로 개설 등으로 대전 중심의 교통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다.
대전역 앞에 자리 잡은 중앙시장은 국제시장, 생선골목, 먹자골목 등 8개의 재래시장이 성업 중에 있으며, 특히 동구에서 조성된 6개의 특화거리 중 5개 거리(한복거리 · 공구거리 · 한의약거리 · 인쇄거리 · 중부건어물거리)가 중앙동에 위치하고 있다.
동구 중부의 야산 지역으로, 북쪽에 구릉성 야산이 있어 용운동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에 야산 봉우리가 둘러져 있어 대청동과 경계를 이룬다. 남쪽으로는 구릉을 넘어 가오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경북선 철도와 판암천을 경계로 대동 · 신흥동 · 천동에 인접해 있다.
판암동 지역은 조선 말기, 널로 다리를 놓은 지역이라 하여 너더리 또는 판교(板橋)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상신리(上新里), 산소리(山所里), 저전리(楮田里)와 구정리(九丁里) 일부가 병합되어 산소리라 불리다가, 이후 판암리(板岩里)가 되었고, 대전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 외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40년 대전부 구역 확장 때 판암정(板岩町)으로 명명되었지만,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판암동(板岩洞)이 되었다. 그 뒤 1992년 9월 1일 판암1동과 판암2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옥천선(국도), 경부선 철도 및 남부순환도로를 잇는 판암 I.C와 지하철 1호선의 시발점인 대전의 관문으로 삼정골, 망태골, 집너머 마을 등의 자연부락과 아파트 단지로 형성된 도농복합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신리 · 산소리 · 저전리와 동면의 구정리 일부가 병합되어 산소리라 불리다가, 이후 판암리가 되어 대전군의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 외남면에 편입되었고, 1940년 대전부 구역 확장에 따라 판암정이라 하였다가,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판암동이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동구 판암동이 되었으며, 1992년 9월 1일 자로 판암1동과 판암2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황학산의 푸른 녹지공간과 산책로가 자리잡고 있어 쾌적한 자연환경이 조성되어있고, 옥천선과 판암 IC, 판암 차량기지가 접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동구의 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대덕구 오정동, 동쪽으로는 용전동 · 성남동과 인접해 있다. 남쪽으로는 경부선 철도를 경계로 삼성동 · 성남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 대덕구 오정동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홍도동 지역은 예부터 복숭아나무가 많아 홍돗골 또는 홍도(弘道)라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 대전면에 편입되면서 세교리(細僑里), 동산리(東山里), 무릉리(武陵里) 일부와 내남면의 봉촌(鳳村) 일부를 병합하고, 홍도리(弘道里)라 하였다. 1935년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대전부 구역 확장에 따라 홍도정이라 하였는데,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홍도동(弘道洞)이 되었다.
홍돗골 동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동산 또는 동산리라고 부르며, 남쪽에 위치한 마을은 비가 오면 물에 잠기는 잔다리가 있다고 해서 잔다리, 또는 세교라고 불렀다. 또한 잔다리와 동산 홍돗골에 걸쳐 큰 방죽이 있었는데, 이를 잔다리 방죽, 동산리 방죽, 홍돗골 방죽이라 불렀다.
홍도동 중심부에는 경부선, 서쪽으로는 호남선 철도가 관통하고 있다.
동구의 중부 서쪽 끝의 지역으로, 서부는 대전천 유역이며, 동부는 야산이 둘러싸고 있다. 북쪽 구릉성 등성이 너머로 신흥동 · 판암동과 인접해 있고, 동쪽 산봉우리를 경계로 대성동 · 인동 · 삼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대성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대전천이 흘러 중구의 석교동 · 옥계동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효동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전군 대전면에 편입되었고, 장대리(場岱里)와 외남면 정포리 일부를 병합해, 본정3정목(本町三丁目)이라 불렸다.
1946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이웃인 본정2정목이 인동(仁洞)인 것에 연유하여 인효(仁孝)의 지역이라는 뜻으로 효동(孝洞)이라 하였다.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대전직할시 동구 효동이 되었으며, 이후 대전직할시의 광역시 승격과 함께 대전광역시 동구 효동이 되었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며, 번화가는 서부의 동구중구 도로변, 남부의 대전금산 국도변에 집중되어 있다. 천동파출소, 가오동우편취급소, 동구가오도서관 등의 공공기관과 천동종합상가 등이 위치해 있다. 주요 간선도로로는 대전~금산 간 국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