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광역시 서구는 북쪽과 서쪽으로 유성구, 동쪽으로 중구, 남쪽으로는 충청남도 금산군 · 논산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16'∼127°24', 북위 36°10'∼36°22'에 위치하며, 면적은 95.48㎢, 인구는 49만 859명이다.(2015년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23개 행정동(27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동에 위치하고 있다.
대전광역시 서구의 지형은 구봉산과 월평산을 중심으로 갑천과 유등천이 휘감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대전광역시 중심부과 서쪽지역에 걸쳐 자리 잡고 있고, 서남부 일대의 산지를 제외하면 낮은 분지나 평지로 형성되어 있어 땅이 비옥하다.
갑천은 계룡산 남쪽에서 발원한 벌곡천을 상류로 하여 장안동에서 발원한 매노천까지 합류하여 흐르다가 월평동에 이르러서 건천, 갈마동 북쪽에 이르러서는 유성천과 합류해 큰 줄기를 형성한다. 이는 다시 삼천동 유역에서 대전천과 합류하여 북쪽으로 흘러 대덕구 신탄진에 이르러 금강 본류와 합류한다. 서구의 동쪽을 흐르는 유등천은 금산군 진산면 청정리 산기슭에서 발원하여 금산군 복수면에서 진산천과 만나고, 도마동에 이르러 동북 방향으로 흐르다가 삼천동 유역에서 대전천과 합류한 후 갑천, 금강 본류와 만난다.
기후는 한서의 차가 다른 지방보다 심한 편이며, 지난 10년간(2008년 기준) 최고기온 37.7℃, 최저기온 -16.2℃를 기록하였다. 고온다습한 여름과 저온건조한 겨울 탓으로 연 강수량의 70% 이상이 여름철에 내리고, 겨울의 강수량은 매우 적다. 평균기온은 13.9℃이며, 1월 평균기온 -0.5℃, 8월 평균기온 25.9℃로 연교차가 27℃에 이른다. 강수량은 편차가 심해 적을 때는 829㎜(2001년), 많을 때는 1,749㎜(2003년)를 기록한 적도 있으나, 보통 1,500㎜ 안팎이다. 풍향은 북서풍이 부는 1~2월을 제외하고는 남서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대전광역시 서구 지역은 백제 때에는 우술군 · 황등야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에는 비풍군 · 황산군에 속했다. 고려 때에는 공주부에 속해 명학소(鳴鶴所)가 있었던 노전(爐田)으로 망이 망소이 난(亡伊亡所伊亂) 때에는 충순현(忠順縣) 지역에 해당하였다.
조선시대인 1895년(고종 32)에는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공주군, 회덕군, 진잠군의 각 일부 지역이 되었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대전군에 편입되었다.1931년에는 대전읍 대덕군 유천면에 속하게 되었고, 대전은 1935년 대전부(大田府), 1949년 대전시로 개편되었다.
1962년 11월 1일 법령 제1167호로서 대전시 지역 확장에 따라 대덕군 유천면 지역이었던 안영리(安永里), 복수리(福守里), 사정리(沙亭里), 도마리(桃馬里), 정림리(正林里), 변동리(邊洞里), 가장리(佳莊里), 내동리(內洞里), 용두리(龍頭里), 괴정동(槐亭動), 탄방리(炭坊里), 삼천리(三川里), 갈마리(葛馬里), 월평리(月坪里), 둔산리(屯山里)가 대전시로 편입되었고 리(里)를 법정동명으로 불렀다. 이 지역들은 1977년 9월 1일부터 중구에 속했으며 1983년 2월 15일에는 기성면(杞城面)의 관저리(關雎里), 도안리(道安里), 가수원리(佳水院里)도 중구에 편입되었다.
1985년 4월 10일 대전행정구역상 중심지인 둔산 지구 225만 5천 평이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지정 고시되면서 신흥 둔산 신시가지 조성사업이 착수되었으며, 1988년 1월 1일 중구가 분리되어 14개 동으로 서구가 신설되었다. 1988년 1월 30일 가수원동 일부가 정림동에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대전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대덕군 기성면 일원이 서구에 편입되었고, 유성파출소 관할 일원과 관저동 일부가 유성구에 편입 · 분리되었으며, 서구 안영동 일원이 중구에 편입 · 분리되었다. 1990년 2월 10일로 괴곡동의 일부가 각각 도마2동, 가수원동에 편입되어 행정동 관할구역이 변경되었다. 1990년 4월 1일에는 정림동 일부가 복수동에 편입되었고, 1993년 11월 1일 둔산 지구 탄방 · 둔산 · 월평동, 1994년 7월 1일 월평1동, 1996년 1월과 8월 둔산2동 · 내동, 1998년 1월 1일 갈마2동 · 월평3동 · 만년동, 2003년 2월 관저동이 분동되어 23개 동에 이르게 되었다.
서구 지역의 유형문화유산으로는 만회집 탄옹문집 판목, 상제집략 판목, 용천련고 판목 등이 있다. 만회집 탄옹문집 판목은 1989년, 상제집략 판목과 용천련고 판목은 1992년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무형유산으로는 불상조각장, 단청장이 있으며, 기념물로는 월평동 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89년 지정), 흑석동 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 둔산 선사유적지(대전광역시 기념물, 1992년 지정)가 있다. 불상조각장은 1999년, 단청장은 2000년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문화유산자료는 도산서원, 송준길의 묘, 류혁연의 묘, 수정재, 파평윤씨 서윤공파 고택, 김여온의 묘 등이 있다. 도산서원과 송준길의 묘는 1989년, 류혁연의 묘는 1991년, 수정재와 파평윤씨 서윤공파 고택은 1992년, 김여온의 묘는 1989년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이밖에 유적으로 평촌동 고인돌, 우병사 지팡이돌, 내동리 고인돌, 효자 거창신씨 정려, 영모재, 덕수이씨 정려, 단묘, 경평군 태실, 탄방동 청동기, 괴정동 청동기, 농경문청동기 등이 있다.
사찰로는 매노동의 정토사, 가수원동의 용화사, 탄방동의 세등선원, 장안동의 삼신당, 흑석동의 봉천사, 도안동의 돈파사, 산직동의 대흥사, 도마동의 내원사, 평촌동의 구한사 등이 있다.
서구 지역의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8개교, 중학교 29개교, 고등학교 17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으며, 혜천대학과 배재대학교, 목원대학교 등이 있다.
의료시설로는 종합병원, 병원, 의원, 치과병(의)원 , 한방병(의)원, 보건소, 조산소, 보건지소가 있으며, 건강체련관은 연면적 2847㎡,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1997년 2월 13일 전국 최초로 건립되었다. 수영장을 비롯한 체력단련장, 수치료실 등 체력단련과 재활휴식을 위한 다목적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장애인은 무료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또한 노인복지서비스 제공을 통한 노인문제의 예방과 치료, 노인복지욕구 충족을 위한 삶의 질적향상 도모를 위한 노인복지회관이 있으며 월평, 한밭, 용문, 둔산, 정림, 관저동에는 종합사회복지관이 있어 아동, 청소년, 장애인, 노인, 지역복지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도마동에 위치한 대전여성회관은 여성의 경제력 향상을 위한 기술교육 운영, 여성의 경제활동 지원을 위한 부업지도 교육, 건전한 여가선용과 자질함양을 위한 취미교실 등을 운영하여 여성의 사회적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이 밖에도 둔산동의 서구문화원, 청소년 육성을 위한 만년동의 평송청소년수련원, 시립미술관, 대전문화예술의 전당 등이 있다.
체육시설로는 도마동 유등교 하류에 유등천 인조잔디 축구장 · 테니스장이 조성되어 있어 동호인 등 많은 주민들이 생활체육을 즐기고 있다. 괴정동의 경성스포츠센터는 수영, 에어로빅, 볼링, 헬스, 사우나, 태권도, 아기스포츠단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남선공원 내 남선공원종합체육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빙상장, 파도풀장, 스쿼시장, 헬스장 등의 시설이 구비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국민생활관, 싸이클장, 궁도장이 있어 많은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둔산동의 둔산대공원, 씨애틀공원, 샘머리공원, 보라매공원, 둔지미공원, 월평동의 은평공원, 월평공원, 괴곡동의 상보안유원지, 탄방동의 남선공원, 관저동의 장갓골 공원, 신선암공원, 느리울공원, 갈마동의 갈마공원, 가수원동의 가수원공원, 복수동의 복수공원, 도안동의 도안공원, 변동의 변동근린공원 등은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용수마을은 서구 가수원동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이 마을 위쪽에 있는 개울에는 움푹 패인 웅덩이가 있는데, 이 소를 ‘용소’라고 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옛날 이 냇물의 웅덩이에 용이 살고 있었는데, 때가 되어 그 용이 승천하려는 순간에 그 동네 부인이 불을 때다 말고 그 부지깽이로 그 용을 가리키면서 “용이 올라간다”고 하니, 부정이 타서 그 용이 어디론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냇물의 웅덩이에서 용이 오르다 떨어졌다는 인연으로 이를 ‘용소’라 하였고, 나아가 이 ‘용소’의 아래에 있는 마을을 ‘용소마을’ 또는 ‘용수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정방마을은 서구 평촌동 옛성 부근에 있는데, 그 고성은 백제 때의 것이라 전해진다. 이 마을 이름과 관련되어서는 전설이 하나 전해지는데, 백제 말기에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 와 이 동네에 당나라 소정방이 진을 치고 전투를 지휘하였는데, 그 주변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정방의 군사들에 붙들려 강제 노동으로 그 성을 쌓게 되었다. 그것이 정방군을 돕고 백제를 멸망시키는 줄 알면서도 우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부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정방군과 신라군이 백제를 멸망시켰고, 이 동네 사람들은 백제 유민들로 신라의 통치를 받으면서 소정방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동네를 ‘정방’이라 부르게 되었는 것이다.
서구 지역은 총 면적 중 임야면적이 47.68㎢(49.9%)로 가장 넓고, 10.8%가 경지에 해당하며 밭이 3.92㎢, 논이 6.43㎢이다. 화훼 · 과수(포도 · 배 · 사과 · 복숭아 등) · 비닐하우스 채소 재배 등의 근교농업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동방산업 · 대원제지 · 부원공업 · 한국신약 · 원미섬유 · 선양소주 등이 있으며, 공업은 기계 · 화학 · 식품 · 제지 · 섬유 공업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괴정동의 롯데백화점, 둔산동의 갤러리아 타임월드점, 삼천동의 세이브존 , 탄방동의 까르푸, 둔산 전자타운이 있으며, 한민시장, 도마시장 등의 재래시장이 있다.
또한 둔산신시가지는 정부기관 11개 외청이 입주를 완료하고 대전시청사가 둔산 지역으로 이전함에 따라 서구는 제2의 행정수도로 본격적인 기능을 시작했다. 법원 · 검찰 · 각종 은행 등의 이전과 더불어 명실공히 대전의 중심이 되었다. 이와 함께 한밭문예회관 건립과 함께 둔산문예벨트가 조성되어 서구는 문화와 행정이 조화를 이루는 쾌적한 도시로 자리 잡았다.
서구는 1980년대 둔산지구 택지개발사업 등으로 타구에 비하여 양호한 가로망 체계를 갖추고 있으나, 둔산신시가지에 정부대전청사가 입주하는 등 급속한 도시발전 및 인접한 북대전IC, 서대전IC 및 공주, 조치원, 논산 방향으로의 진출입 차량 등으로 교통이 나날이 혼잡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서구에는 선사시대 주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많이 출토된 둔산 선사유적지가 있으며, 남선산 기슭에 만회 권득기, 탄옹 권시 부자의 학문과 학덕을 기리는 도산서원이 있다. 또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붉은 낙조가 산아래 용태울 저수지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는 장태산 휴양림과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구봉산이 있으며, 월평공원 · 은평공원 · 샘머리공원 · 보라매공원 · 갈마공원 · 가수원공원 등 주위에 공원들이 많아 구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쪽으로 중구 산성동과 사정동이 유등천을 경계로 하여 접해 있고, 서쪽은 정림동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은 도마1·2동이 있고, 남쪽은 중구 안영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백제 때 노사지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儒城縣)에 속했다.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한 복수소(福守所)였다. 조선시대 초기엔 공주군에 속해서 유등천면에 속했다가 조선시대인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변경 때 회덕군에 편입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마리(挑馬里) 일부가 병합되어 복수리라 하여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대전시 구역확장에 따라 대전시에 편입되면서 복수동이라 하고 대전시 중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1월 1일 대전시 서구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정림동 일부가 편입되었고 동년 11월 15일 정림동 군인아파트가 복수동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대전직할시가 대전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서구 복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복수동은 혜천대학, 대신중고등학교, 동방여자중고등학교, 복수초등학교 등 교육기관이 밀집해 있고, 오량산, 쟁기봉, 유등천 등 천혜의 자원이 있는 지역이며, 서부외곽도로 준공 등으로 서남부권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하였다.
백제 때는 노사지현에 속했다. 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백제 때는 진현성으로 드나드는 중요한 길목이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엔 많은 선비들의 낙향지(落鄕地)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 공주군 관할 유등천면(柳等川面) 지역으로 산 모양이 도마뱀처럼 생겼다 하여 도마달 또는 도마다리라고 불렸는데, 이후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변경 때 회덕군(懷德郡)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사마리(司馬里), 산적리(山積里), 송산리(宋山里), 변동(邊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마리(桃馬里)라 해서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대전시 구역확장에 따라 도마동이 되어 대전시에 편입되고, 그 후 대전시 중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1월 1일 대전시 서구에 속했으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서구 도마동이 되었다.
도마1동은 단독주택으로 형성된 재래도심 지역으로, 일부상가와 재래시장으로 형성된 서민층이 대다수 거주하는 지역이다. 도마2동은 아파트(40%)와 주택(60%)이 조화를 이루어 안정된 주거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며, 배재대학교를 비롯해 7개의 학교시설과 여성회관 등 주민복지시설이 위치해 있다.
백제 때 노사지현에 속했다. 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 유등천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895년(고종 32)에는 회덕군에 속했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혁으로 순평리와 명암리를 병합하여 정림리로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1963년 1월 1일 대전시 정림동이 되었다.
1977년 9월 1일부터는 중구청에서 관할하게 되었고, 1979년 5월 1일 도마동의 분동으로 도마2동에서 관할하기도 하였다. 1988년 1월 1일부터는 서구청에서 관할하게 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직할시 서구 도마2동에 편입되었다. 1992년 9월 1일 정림동 사무소 개소로 인하여 정림동과 괴곡동 일부를 법정동으로 관할하였으며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서구 정림동이 되었다.
정림동은 일반주택(23%)와 아파트(77%)가 어우러져 있는 신흥개발 도농복합지역으로 안정된 주거공간과 전원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대전 서구의 동남쪽에 있는 법정동이자 행정동이다. 동쪽으로 유등천(柳等川)을 경계로 태평2동, 서쪽으로 월평동, 남쪽으로 도마1동 · 도마2동, 북쪽으로 가장동 · 내동과 접한다.
변동은 백제 때 노사지현에 속했고, 신라(新羅)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에 속했다.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엔 공주군에 속해서 유등천면의 지역이었다. 이후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변경 때 회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혁할 때에 도마리 일부와 천내면의 내동 일부를 병합하여 변동리라 하여 대덕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의하여 대덕군에 편입되고, 1963년 1월 1일 대전시 구역 확장에 따라 변동으로 편입되어 대전시 중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서구 변동이 되었으며, 다시 1995년 1월 1일 대전직할시가 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서구 변동이 되었다.
변동의 명칭은 유등천 둔치에 있던 마을 ‘갓골’에서 유래되었다. 홍수가 나면 마을이 침수되곤 하였기 때문에 갓골로 불렸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지금의 변동으로 바뀌었다. 자연마을로는 마골 · 복골 · 황각골 · 손독골 · 산여미랭이 · 삼정모롱이 · 중보안 · 물방거리 등이 있었으며, 현재는 신흥 단독주택 지역으로 기업체와 아파트가 전혀 없다.
백제 때 노사지현에 속했고, 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엔 공주군에 속해서 유등천면의 지역이었다.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변경 때 회덕군 유등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혁할 때 반심리, 평리와 삼내면의 탄방리와 산내면의 중촌 방축리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용두리라는 이름으로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가 신설됨에 따라 대덕군 유천면에 편입되었고, 1963년 1월 1일 대전시 구역확장에 따라 대전시로 편입되어 용문동이라는 이름으로 대전시 중구에 속하게 되었다.
용문동은 현재 법정동이자 단독 행정동이지만 한때는 용문동과 탄방동 등 두 개의 법정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의 역할을 해오다가, 1993년 11월 탄방동이 행정동으로 분동되면서 현재와 같이 단독 행정동이자 법정동으로 남게 되었다. 그 뒤 1995년 1월 1일 대전직할시가 대전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이곳을 대전광역시 서구 용문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유등천을 끼고 계룡로가 관통하는 서구의 관문지역으로 용문네거리를 중심으로 금융, 서비스업 등 상업지역이 형성되어 있고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이 혼재하는 전형적인 도시지역이다.
서구의 북동부에 위치한 행정동으로 동쪽은 유등천을 경계로 하여 중구 중촌동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은 둔산동, 남쪽은 용문동, 북쪽은 둔산동, 삼천동과 연접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참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었고, 그 참나무를 베어서 숯을 굽는 숯방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숯방이’로 부르다가 이후 ‘숯뱅이’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여 탄방동이라 하게 되었다.
백제 때 노사지현에 속했고, 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 초기엔 공주군에 속했으며, 조선 말기엔 공주군 천서면의 지역이었다.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변경 때 회덕군 천서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혁할 때 승천리, 백운리 일부와 서면의 갑천리 일부가 병합되어 탄방리라는 이름으로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따라 대덕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대전시 구역 확장에 따라 대전시에 편입되어 탄방동이 되었으며, 그 뒤 대전시 중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1월 1일 서구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행정동이자 법정동인 탄방동은 한 때 용문동 관할의 법정동이었다가 1993년 11월 1일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시 1995년 1월 1일 대전직할시가 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서구 탄방동이 되었다.
6개 아파트단지, 다수의 주상복합건물, 다가구주택과 일반주거지역으로 혼합되어 있어 주민성향이 다양하고, 정부청사 · 시청사와 인접하여 있으며, 남선공원이 자리하여 주민 휴식공간으로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삼천동은 동쪽의 유등천 좌안도로인 버드내길에서 서쪽의 문정로, 북쪽의 한밭대로에서 남쪽의 목련길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감천, 유등천, 대전천 등 세 냇물이 합치는 곳에 있다고 하여 삼천리(三川里)라 불려왔으며, 서구의 동북 끝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대덕구의 대화동, 오정동, 서쪽은 서구의 둔산동, 남쪽은 탄방동, 북쪽은 역시 둔산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삼천동은 백제 때 노사지현에, 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 고려 때는 공주부, 조선 초기인 1413년(태종 13)에 회덕현, 조선 말기엔 회덕현 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신촌, 갑천리, 상신리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삼천리라 하였고,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대전시 구역확장에 따라 대전시에 편입되어 법정 삼천동이 되어 1991년 12월 1일 행정동 삼천동이 되었다. 삼천동은 법정동으로 둔산동과 탄방동 일부를 관할하고 있다가 1993년 11월 1일 둔산동이 분동되면서 행정동이자 법정동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5년 4월 정부의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고시된 둔산 지구에 포함되어 본격적인 개발로 신도시가 조성되어 신흥아파트의 밀집지역으로 변했지만 옛날에는 한적한 전원의 운치가 풍기는 농촌지역이었다. 공동주택이 90%를 차지하고, 영세민 아파트가 위치해 있어 다양한 소득층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서구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삼천동, 서쪽으로 갈마동, 남쪽으로 탄방동, 북쪽으로 유성구 구성동과 접한다.
삼국시대에는 백제 노사지현, 통일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공주군 천내면(川內面)에 속했다가, 1895년(고종 32) 회덕군(懷德郡) 천내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정항리(井項里) · 행정리(杏亭里) · 신대리(新垈里)와 서면 정두리(井頭里)를 병합해 대전군 유천면 둔산리가 되었다.
1963년 대전시 법정 둔산동이 된 뒤, 서부출장소 관할을 거쳐, 1977년 중구에 편입되었다. 1988년 서구 갈마동의 법정동을 거쳐, 1990년 삼천동의 법정동이 되었다가, 1993년 행정동으로 분동되었다. 1996년 다시 행정동인 둔산1동과 둔산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른다.
1983년 대덕연구단지와 연결되는 대덕로가 생기고, 1985년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둔산1동은 대전광역시청, 법원, 검찰청, 우체국과 금융기관이 밀집한 지역으로 유동인구가 많다. 둔산2동은 정부대전청사, 대전광역시교육청, 한국은행 대전지역본부를 비롯해 60여 개의 금융기관과 대규모 상업시설이 있는 대전 지역 행정 · 금융 · 유통의 중심지이다.
둔산1동은 높은 교육 수준과 경제력을 갖춘 중산층 주민들로 고품질의 행정수요가 요구되고 있으며, 행정기관(시청 · 법원 · 검찰청 · 우체국)과 금융기관(은행 · 증권사)이 밀집된 지역으로 유동인구의 증가와 교통의 복잡성이 내재된 도시이다.
둔산2동은 대전정부청사 · 대전광역시교육청등 행정의 중심이며, 한국은행 대전지역본부등 60여 개의 금융기관 위치하고, 갤러리아 타임월드, 이마트 등 많은 상업시설 위치하여, 대전지역의 금융과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북쪽으로 갈마동 · 탄방동, 동쪽으로 탄방동 · 용문동, 남쪽으로 내동 · 가장동, 서쪽으로 갈마동과 접해 있는 서구의 중북부 도심 지역이다.
삼한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였다고 고증되는 지역으로, 괴정동은 백제 때 노사지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에 속했다.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했으며 조선 초기엔 공주군 천내면의 지역이었고,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변경으로 회덕군 천내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혁할 때 지동(芝洞), 하응리(下應里), 응기리(應起里), 백운리(白雲里) 일부가 병합되어 괴정리(槐亭里)로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가, 1935년 11월 1일에 대전부가 신설됨에 따라 대덕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63년 1월 1일 대전시 중구 용문동에 편입되었다가, 1970년 7월 1일 용문동 · 괴정 · 가장동으로 분할되었다. 1988년 1월 1일 대전시 서구 괴정동으로 개편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서구 괴정동으로 승격되었다. 1991년 11월 15일 탄방동의 군부대 부지 일부가 편입되었고, 1995년 1월 1일 대전직할시가 대전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서구 괴정동이 되었다.
1970년대까지 있던 임야는 모두 택지로 개발되어 대단위 아파트단지와 직교형 가로망을 갖춘 시가지가 되었으며, 번화가는 북부를 가로지르는 대전~공주 간 32번 국도변과 중앙부를 관통하는 대로변에 집중되어 있다. 다양한 계층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서구의 중심지역으로 둔산 지역과 인접한 교통의 요충지이다.
북쪽으로 괴정동 · 용문동과 인접해 있고, 동쪽에 유등천(버드내)이 흘러 중구 목동과 경계를 이룬다. 또한 남쪽으로 변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 내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백제 때 노사지현에 속했고, 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 초기에 공주군 천내면의 지역이었으며 조선 말기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변경 때 회덕군 천내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혁할 때 가장골의 일부를 잘라 가장리라 하여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대전시 구역 확장에 의해 대전시에 편입되어 가장동이라 하였고, 대전시 중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2년 9월 1일 중구 괴정동에서 분동하였고,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서구로 편입되었다. 다시 1995년 1월 1일 대전직할시가 대전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서구 가장동으로 되었다.
1970년대까지 농경지가 있었으나 토지구획정리사업에 의하여 새로이 조성된 도로 부지 및 시가지 · 주택지로 바뀌었으며, 번화가는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도로변에 집중되어 있다. 가장동은 서구의 관문이며, 교통의 요충지이자 아파트와 단독주택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전형적인 주거지역이다.
서구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법정동과 행정동이 같다. 동쪽으로 가장동, 서쪽으로 월평동, 남쪽으로 변동, 북쪽으로 괴정동과 접한다.
백제 때 노사지현에 속했었고, 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공주부(公州府)에 속했다. 조선 초기엔 공주군 천내면(川內面)의 지역이었으며,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변경으로 회덕군 천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혁으로 가장리의 일부와 예정리가 병합되어 내동리(內洞里)라는 이름으로 대전군 유천면(柳川面)에 편입되었다. 1963년 대전시로 편입되었으며 대전시 중구에 속하였다.
1988년 1월 1일 대전시 서구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서구 법정동으로 가장동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대전직할시가 대전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서구 가장동에 속했다가, 1996년 8월 26일 가장동에서 분동되어 행정동으로 개소되었다.
임야로 이루어진 월평공원이 인접해 있는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주거지역으로 상업인구보다는 직장인이 많이 거주하는 안정된 주택지역이다. 동서로 확장과 서부순환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서구관문의 교통 중심지가 되고 있다.
북쪽으로 월평동 · 둔산동과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 둔산동 · 탄방동과 마주한다. 남쪽에 뻗어 있는 구릉성 야산의 능선을 경계로 괴정동 · 월평동과 접경을 이루며, 서쪽으로 월평동에 인접한 서구의 행정 중심지이다.
동명의 유래는 풍수설에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갈마울 · 갈마리라 하였다. 공주군 천내면의 지역으로서 1895년(고종 32) 회덕군 천내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복수리(伏水里: 수문들) · 화암리(花岩里)를 병합하여 갈마리(葛馬里)라고 하여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에 대전군이 폐지되면서 신설된 대덕군 유천면의 지역이 되었다가 1963년 대전시 구역 확장으로 대전시에 편입되어 리를 동으로 고쳐 갈마동이 되었고, 둔산동(屯山洞) · 월평동(月坪洞)을 통합 관할하게 되었다. 1971년에 출장소 설치로 서부출장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가 1977년에 신설된 중구에 편입되었다. 이후 1988년 중구에서 분구된 서구에 편입되었다. 1993년 둔산동은 삼천동에 편입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삼천동에서 분리, 독립되었고, 월평동도 분리, 독립되었다. 1994년 일부 지역이 유성구 복명동에, 1995년 만년동 · 월평동 · 둔산동에 각각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법정동인 갈마동은 행정동인 갈마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70년대까지는 농경지가 있었으나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따라 직교형 가로망이 생기고 모두 도로나 주택지로 바뀌었으며, 번화가는 서구청을 중심으로 중앙부의 사거리변에 집중되어 있다. 서구구청 · 통계청 충남통계사무소 · 대전도시개발공사 · 갈마동파출소 · 대전소방본부 · 갈마동우체국 · 대전상수도사업본부 · 대전임업협동조합 · 갈마도서관 등의 공공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백제 때 노사지현에 속했고, 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에 속했으며 조선 말기엔 공주군 천내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인 1895년(고종 32) 행정구역 변경 때 회덕군 천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혁할 때에 성본리 · 삼의리 · 곡촌이 병합되면서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의하여 대덕군 유천면에 편입되었고, 1963년 1월 1일 대전시 구역 확장에 따라 법정 월평동이라 하여 대전시에 편입되어 대전시 중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1월 1일 서구에 편입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1993년 11월 11일 행정동으로 월평동이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이 되었다. 행정동이자 법정동이던 월평동은 현재 월평1동 · 월평2동 · 월평3동 · 만년동으로 분리되었다.
월평1동은 둔산신시가지 조성의 택지개발지역으로 1개의 아파트 단지와 일부의 부락을 제외하고, 다가구용 주택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또한 상가형성지역이 넓어 토착 인구보다 유입인구가 많으며, 아직 미건축공한지가 다수 상존하여 도시 환경에 역점을 두고 있다.
월평2동은 선사유적지를 아우르는 ‘ㄱ자’ 형태의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혼재된 신흥아파트 지역으로 복지행정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지역이다.
월평3동은 둔산 신도시 지역에 위치해 있는 동으로 동쪽으로는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밀집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월평공원, 서북쪽으로는 갑천이 굽이쳐 흐르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산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거지역이다.
서쪽으로는 역시 갑천을 경계로 하여 카이스트(KAIST)가 있는 유성구 어은동과 서남쪽의 월평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둔산동, 동쪽으로는 대전천을 경계로 대덕구 대화동과 접하고 있다. 법정동으로서 행정동은 만년동이다.
만년동은 백제 때 노사지현에 속했다. 신라 때는 비풍군의 영현인 유성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말기엔 공주군 천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혁할 때 성본리, 삼의리, 곡촌이 병합되어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신설에 의하여 대덕군 유천면에 편입되었고, 1963년 1월 1일 대전시 구역확장에 따라 월평동이라 하여 대전시에 편입되어 대전시 중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1월 1일 서구에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서구에 속하게 되었으며, 1993년 11월 1일 갈마동에서 월평동으로 분동되었다. 1994년 7월 1일 월평동에서 월평2동이 분동되었으며, 1998년 1월 1일 월평2동에서 법정동이자 행정동인 만년동으로 분동되었다.
둔산공영개발지구로서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이루고 있으며, 주요 기관으로는 서구보건소와 KBS 대전총국, 1997년 문을 연 평송청소년수련원 등이 있다. 만년동은 갑천변을 낀 반월형에 4개 단지 아파트 지역과 일반주택지역에 다가구 주택 · 상업 및 업무용 건물이 혼재하고 있으며, 둔산대공원과 시립미술관, 예술의 전당등 문화 · 예술 · 휴식공간이 함께 위치한 쾌적한 지역이다.
북쪽으로 유성구 용계동, 신흥동과 인접해 있고, 동쪽 갑천 위 산봉우리를 경계로 도마동, 동남쪽 선골고개 너머 금산군 진산면, 안영고개 너머 중구 안영동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남쪽에는 구봉산이 솟아 있어 봉곡동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에 구릉성 야산이 뻗어 있어 유성구의 용계동 · 대정동 · 교촌동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서부는 구릉성 산지이며, 동부는 갑천 유역으로 평야(도안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백제 때 진현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진령현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기성부에 속했으며 그 뒤에는 공주부에 속한 지역이었다. 조선 초기인 1413년(태종 13)에 진잠현(鎭岑縣)에 속해서 조선 말까지 속해 있다가 1895년(고종 32) 진잠군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조정으로 대덕군 기성면으로 획정(劃定)되었고, 1935년 11월 1일 대전읍부제(邑府制) 실시로 인해 대덕군 기성면이 되었다.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중구 가수원동이 되었고, 1988년 1월 1일 서구 가수원동으로 변경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과 동시에 대전직할시 서구 가수원동이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에는 대전광역시 서구 가수원동이 되었다.
서구의 관문으로 서남부생활권의 중심이며, 자연부락과 아파트가 공존하는 주민욕구가 다양한 도농복합지역이다.
구봉산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서구 가수원동, 서쪽으로는 유성구 원내동, 남쪽으로는 서구 봉곡동과 괴곡동, 북쪽으로는 서구 도안동과 접하고 있다.
백제시대에는 진현현(眞峴縣), 신라시대에는 진령현(鎭嶺縣), 고려 초기에는 기성부(杞城府), 1018년(현종 9)에는 공주부, 1417년(태종 17)에는 진잠현(鎭岑縣) 관저리, 1895년(고종 32)에는 진잠군(鎭岑郡) 동면(東面)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진잠현의 옛 이름인 기성관(杞城館) 아래쪽이라는 이유로 관하촌(館下村) · 관저리(館底里)라고 하다가 서승지(徐承旨)가 살면서 『시전(詩傳』에 나오는 ‘관관저구(關關雎鳩)’의 글귀를 따 관저동이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노곡리와 축암리를 합하여 관저리라 하고 대전군 기성면에 속했다가, 1935년 11월 대덕군 기성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 대전시의 확장에 따라 대전시 중구로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대전시의 직할시 승격에 따라 대전직할시 서구 관저동이 되었고, 1995년부터 대전광역시 서구 관저동이 되었다. 2003년 2월 서구 가수원동에서 관저동으로 분동되어 법정동이자 행정동이 되었다.
흑석동, 매노동, 산직동, 장안동, 평촌동, 오동, 우명동, 원정동, 용촌동, 봉곡동 10개의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서 미작생산이 주를 이루고 있고, 산수경관이 수려하여 시민의 휴식처로도 각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