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대전광역시) (())

대전광역시 중구청
대전광역시 중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대전광역시 중남부에 위치한 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대전광역시 중남부에 위치한 구.
개관

북쪽은 대덕구, 동쪽은 동구, 남쪽은 충청남도 금산군, 서쪽은 서구와 접한다. 동경 127°22'∼127°27', 북위 36°12'16"∼36°20'에 위치한다. 면적은 62.13㎢이고, 인구는 25만 618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7개 행정동(26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에 있다.

자연환경

동쪽은 대전천(大田川)을 사이에 두고 동구와 접하고, 서쪽은 유등천(柳等川)을 사이에 두고 서구와 접한다. 따라서 중구의 지형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지형을 이루며, 남쪽은 보문산(寶文山, 458m) 일대에서 가장 높은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화강암류가 분포한 지역은 저지를 이루고 있는 반면 변성암류 및 반암류가 분포한 지역은 험준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용두동 구릉은 높이 70∼90m의 낮은 구릉으로 대전을 동과 서로 구분하는 중요한 경계령이다.

기후는 한서의 차가 다른 지방보다 심한 편이다. 고온다습한 여름과 저온건조한 겨울 탓으로 연 강수량의 70% 이상이 여름철에 내리고 겨울의 강수량은 매우 적다. 평균기온은 13.9℃이며, 1월 평균기온 -0.5℃, 8월 평균기온 25.9℃로 연교차가 27℃에 이른다. 강수량은 편차가 심해 적을 때는 829㎜(2001년), 많을 때는 1,749㎜(2003년)를 기록한 적도 있으나, 보통 1,500㎜ 안팎이다.

역사

1914년 총독부령 제111호로 도 부군면의 폐합을 단행하여 회덕군, 진잠군과 공주군 현내면을 폐합 대전군을 설치하였고, 현 중구 지역은 대전군 산내면 및 유천면의 일부 지역이었다. 1931년 총독부령 제103호로 읍면제 실시에 따라 대전읍으로 승격하였고, 1932년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현 위치인 대전으로 이전하였다. 1935년 총독부령 제112호로 부제실시에 따라 대전 지역이 대전부로 승격되는 동시에 대전군이 폐지되고 춘일정, 이정목, 삼정목, 목정, 중촌정, 대흥정, 대사정, 부사정, 수정이 편입되고 대전군의 잔여지역으로 대덕군이 신설되었다. 1940년 총독부령 제221호에 의거 대전부 구역확장에 따라 대덕군 유천면의 용두리, 태평리, 유천리, 문화리, 산성리와 산내면의 석교리가 대전부에 편입되었다. 1945년 법률 제32호로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대전부를 대전시로 개칭하였다.

1971년 대전시 조례 제461호로 동부, 북부, 중부, 서부의 4개 출장소를 설치, 동부 11개 동, 북부 9개 동, 중부 14개 동, 서부 11개 동을 각각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하였다. 1977년 대통령령 제8667호로 출장소를 폐지하고 동구, 중구의 2개 구청을 설치 중부출장소와 서부출장소를 통합하여 중구청을 설치하였다. 1979년 대전시 조례 제929호에 의거 도마동을 도마1동, 도마2동으로 분동해 26개 동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하였다. 1982년 대전시 조례 제1231호에 의거 유천동을 유천1·2동으로, 괴정동을 괴정동과 가장동으로 각각 분동해 28개동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하였다. 1983년 대통령령 제11027호로 대덕군 유성읍 일원과 구즉면의 원촌 · 문지 등을 편입하여 1개 출장소 35개 동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하였다. 1983년 대전시 조례 제1303호에 의거 태평동을 1·2동으로 나누었고, 1984년 대전시 조례 제1404호에 의거 유성출장소가 시 직할출장소로 승격되었다. 1985년 대전시 조례 제1461호애 의거 문화동을 문화1·2동으로, 산성동을 산성동과 복수동으로, 도마1동을 도마1동과 변동으로 분동, 34개 동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으로 하였다. 1987년 대통령령 제12007호로 대덕군 진잠면의 학하리 일원을 대전시 중구 원내동에, 동구의 오정동 일부를 중구의 중촌동에 편입하였다. 1988년 중구에서 14개 행정동을 떼어서 서구청을 신설하였다. 1989년 법률 제4049호로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대덕군 산내면의 구완리, 무수리, 침산리, 목달리, 정생리, 어남리, 금동리를 법정도으로 산서동을 행정동으로 하여 현재 법정동 26개동, 행정동 25개동을 관할하는 자치구로 승격되었다. 1998년 대전광역시 중구 조례 제404호로 선화1, 2, 3동을 선화동으로 대흥1, 2, 3동을 대흥동으로, 문창1, 2동을 문창동으로 통합하였다. 1998년 대전광역시 중구 조례 제449호로 은행, 선화동을 은행선화동으로 용두1, 2동을 용두동으로 산성, 산서동을 산성동으로 통합하였다. 2002년 중구 조례1581호로 중구청의 위치를 대흥동 125번지에서 대흥동 499의 1번지로 변경하였다.

유물 · 유적

유형문화유산에는 유회당 (부)기궁재, 여경암 (부)거업재 산신당, 보문산 마애여래좌상, 유회당 판각, 안동권씨 유회당종가 일원이 있다. 유회당 (부)기궁재는 1989년 3월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여경암 (부)거업재 산신당은 1989년 12월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보문산 마애여래좌상은 1990년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유회당 판각은 1991년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안동권씨 유회당종가 일원은 2001년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무형유산은 웃다리농악(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1989년 지정), 대전의앉은굿(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1994년 지정), 유천동 산신제(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1997년 지정), 소목장(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1999년 지정), 연안이씨 가각색편(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2000년 지정), 단청장(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2000년 지정)이 있다.

기념물에는 보문사지(대전광역시 기념물, 1989년 지정), 보문산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89년 지정), 사정성(대전광역시 기념물, 1990년 지정),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대전광역시 기념물, 1991년 지정), 구완동 청자가마터(대전광역시 기념물, 1997년 지정), 구완동 상감청자가마터(대전광역시 기념물, 1997년 지정), 정생동 백자가마터(대전광역시 기념물, 1997년 지정)가 있다.

문화유산자료에는 창계숭절사(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보문사지 석조(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중암사 부도(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유회당 권이진가 유물 일괄(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1989년 지정), 봉소루(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1992년 지정), 국사봉 유적(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1995년 지정), 송씨 양세 정려(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2000년 지정), 거룩한 말씀의 수녀회 성당(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2001년 지정), 대전여중 강당(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2001년 지정), 구 대전형무소 망루(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2001년 지정) 등이 있다.

등록유산에는 대전 충청남도청 구 본관(국가등록문화재, 2002년 지정), 대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구 충청지원(국가등록문화재, 2004년 지정), 대전 충청남도청 구 관사 1·2·5·6호와 부속창고(국가등록문화재, 2004년 지정)등이 있다.

교육 · 문화

교육시설은 초등학교 27개교, 중학교 14개교, 고등학교 14개교, 대학교 1개교가 있다.

의료시설은 종합병원, 병원, 의원, 특수병원, 치과의원, 한의원, 조산소, 부설의원, 보건소, 보건진료소 등이 있다. 지역특성에 맞는 다양한 종합복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서비스를 극대화하며 소외되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기독교 종합사회복지관, 성락종합사회복지관, 중촌사회복지관 등 3개 복지관을 운영, 지원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노인 · 장애인 · 여성 · 보육시설 및 성폭력상담소 등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시설은 문화동에 1979년 세워진 대전 최대공연장 대전시민회관이 있고, 가톨릭문화회관 · 대전문화사랑 · 한밭도서관 · 대전학생문화회관 등이 있다. 대흥동의 대전극장, 선화동의 갤러리아 동백 시네마, 문화동의 CGV 대전9 등의 영화 상영관이 있으며, 체육시설은 한밭종합운동장 · 충무체육관 · 대전학생수영장 · 한마음생활체육관 등이 있다.

민속

부사동 부사칠석놀이는 백제시대 두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매년 칠석날이면 선바위에서 부용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또한 부사샘을 개끗히 청소하고, 고사를 지낼 뿐만 아니라 부용과 사득의 합궁놀이를 하였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 부사동에서는 부사칠석놀이를 행하고 있다. 한편 부사칠석놀이는 제35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문창동 엿장수 놀이는 조선 중엽 서정말(西町) 남쪽에 살던 황씨와 북쪽에 살던 김씨의 엿도가 경영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이들은 경쟁적 관계로 다툼이 자주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황씨가 죽게 되었고, 이후 김씨가 죽은 황씨를 기려 매년 정월 보름달 거리제를 지내주었다. 그러면서 두 가문이 예전처럼 화목하게 지내게 되었다. 아울러 이날은 줄다리기 등의 놀이가 향유되기도 하였다.

이곳이 벌판이었던 만큼 벌말에서 전해오는 민속으로서 ‘버드내 보싸움놀이’와 ‘버드내두레’가 있어 1996년과 1997년에 시행한 대전광역시 민속경연대회에 출현하였다. 버드내가 자리한 유등천 주변에 여러 개의 보가 만들어져 드넓은 한밭벌을 비옥한 곡창지대로 바꾸어 주었다. 버드내 보싸움놀이가 전승되고 있는 유등천 주변만 해도 안영동 아들바위 밑 자리한 성산보, 버드내 주민들의 젖줄인 원대보(물문보), 안영리 후보, 복수보, 도마보, 용두보 등이 자리해서 과거 이 지역이 벼농사를 위주로 한 곡창지대였음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버드내 보싸움놀이는 결국 농경이 필수조건인 보의 축조와 그것을 둘러싼 주민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민속놀이로 재구성한 것이다.

제31회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참가종목이기도 한 목달미의 대보름액막이 놀이는 그 옛날에는 곳곳에 있었다 하여 특히 정월 대보름날 한 해의 액을 방어하는 큰 행사로 치러졌고 돌림병이 돌 때는 놀이적 성격보다는 액막이 마을 굿에 가까운 형태로 행해졌다고 한다. 이 민속이 목달미에서 언제부터 행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목달미, 무수리 마을이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안동권씨, 은진송씨 등의 세거지인 이 고장은 유교의 전통고장으로 전해오고 있고 주산인 보문산은 곳곳에 절터가 발견되는 불사가 많았던 산이었음이 확인된다. 목달미 마을의 디딜방아 액막이 풍습도 이 같은 지역적 특성이 가미되어 제가 행해지고 거촌적인 행사로 치러졌다.

버드내에서는 매년 음력 동짓달에 산신제와 정월 보름날에 거리제를 지내고 있다. 산신제와 거리제는 버드내 동민들의 액운을 막고 안녕과 번영을 축원하는 제의 하나이다. 특히 ‘유천동 산신제’는 1997년 1월 9일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거리제는 음력 정월 14일 저녁에 지냈는데, 이는 ‘김서방 도깨비’를 대상으로 하여 동네의 액운이 없기를 기원하는 제의였다. 제의 비용은 해마다 걸립을 돌아 집집마다 쌀 한 되를 거두어 충당했다. 제관은 거리제 며칠 전에 정갈하고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선정하였으며, 일단 제관으로 선출된 사람은 일반 제관에 준한 금기가 따랐다. 제물은 삼색실과 백설기 한 시루, 명태포, 술 등을 준비하였고, 제기는 제관으로 선정되는 사람의 집 그릇을 사용했다. 제의는 제관이 분향, 강신하고 재배한 다음 소지(대주소지, 가축소지)를 올리는데, 소지가 끝나면 해물리면서 밥, 떡, 과일 등을 바가지에 담아 ‘물 위의 김창봉 물아래 김참봉’을 세 번 외친 뒤 냇가로 던졌다. 거리제를 마치면 밤새 풍장을 치며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윷놀이, 쥐불놀이를 하며 3일을 놀았다.

한편 산신제는 매년 동짓달에 길일을 택하여 지내오다가 20여 년 전부터는 동짓달 초삼일로 못박아 놓았다. 또 예전에는 산신제를 앞두고 부정한 일이 생기면 일주일쯤 제일을 연기하여 지냈으나 호구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일일이 부정을 가릴 수 없어 요즈음은 초상이나 출산에 개의치 않고 지냈다. 버드내에서 산신제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약 4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당시 산제당이 선 자리는 보문산의 영기를 받은 곳으로 인근의 다른 지역보다 유독 높이 솟아 있어 산제당을 짓고 산신제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설화 · 민요

은행동은 백제 때 우술군에 속했다가 통일신라시대에는 비풍군에 속한 지역이었다가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는 공주목에 속했다. 이곳의 중심부는 천년을 더 살은 은행나무가 의연히 버티고 서 있어 속칭 으능정이라 부르던 자연부락인데 영조 때에는 공주군 산내면 목척리라 하였다. 1885년에는 회덕군 산내면 목척리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개편정책에 따라 군 · 면이 통합되어 대전군 대전면 춘일정 리정목이 되었다. 1946년 해방 후 일본식의 지명 일소책에 따라 옛 지명을 되찾아 으능정이의 한자표기인 은행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은행동에서 예부터 중심을 이루었던 마을은 으능정이와 목척리이다. 으능정이 마을은 은행나무골이라고도 불리었는데 그 자리는 은행동 55·56번지 일대로 추측된다. 이 마을이 으능정이라 불리우게 된 것은 옛날 이곳에는 열 아름이 넘는 큰 은행나무가 있어 그 은행나무 주위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보문산의 전설은 옛날 지금의 보문산 기슭에 아들 오형제를 둔 한 농부가 살았는데, 장성한 아들들은 각각 자기 뜻대로 직업을 달리하여 분가를 하게 되자, 늙어 노인이 되도록 혼자 살게 되었다. 어느 해에 몹시 가뭄이 들어 연못에 한 방울의 물이 없도록 마르자, 그곳에서 두꺼비 한 마리가 나와 농부 앞에 나타났다. 농부는 두꺼비에게 물을 떠다 주었더니 두꺼비는 물을 마신 뒤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다음해도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연못에 나가보니 작년의 그 두꺼비가 접시를 가지고 와서 농부 앞에 놓고 사라졌다. 집에 돌아와 그 접시에 담뱃재를 떨었는데 다음에 보니 접시에 재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이상한 조화라고 생각한 농부는 동전을 놓아 보았다. 이튿날 보니 동전이 또한 가득 차 있었다. 그리하여 큰 부자가 되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아들들이 다투어 접시에 탐을 내게 되었다. 아들들의 욕심과 시기를 염려한 농부는 그 접시를 몰래 뒷산에다 묻고 돌아오다가 숨이 차서 죽고 말았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 접시를 찾았으나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보물이 묻혔다 하여 보물산, 다시 변하여 보문산이라 하였다.

이 밖에도 선화동의 바리바우, 가운데 벌말의 돌다리, 석교동의 돌다리, 옥계동의 애바우, 장대바위, 사정동의 미역바위, 천근의 벙어리샘, 안영동의 옹달샘, 침산동의 아들바위 등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이 지역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에는 물레 돌리는 노래, 그네타령, 시집살이, 앞동산, 명사십리 해당화, 아오라지 뱃사공, 인생타령, 혼인가, 밤 따는 처녀, 첩타령, 이별 한탄가, 높은 산에 눈 날리듯, 베틀가, 낙화지면, 장타령 등이 있다.

산업 · 교통

총면적의 8.7%가 경지, 밭 2.80㎢, 논이 2.65㎢로 농업의 비중이 약하고 2·3차 산업이 활발하다. 남부의 일부 지역에서만 근교농업 형태로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유천2동(柳川二洞)과 태평동(太平洞) 일대에서 과거에는 피혁, 직물 등의 공업이 이루어졌으며, 현재는 농기계 · 제지 · 시멘트 · 슬레이트 · 방직 공업 등이 입지해 있어 소규모 공업단지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은행선화동, 대흥동 일대는 대전의 중심업무지역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상업과 주택지로 각각 발달한 곳이고, 일대는 행정 사법의 중심을 이룬다.

특화거리로 중교통 가구거리는 50년 전통의 가구거리로 대전심장부에 위치하여 대전 상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대전뿐 아니라 인근 충남 · 북과 전북 지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가정용 가구, 사무용 가구, 싱크대, 기물, 샷시 등 가구의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는 가구 전문 거리로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최고의 서비스와 저렴한 가격으로 고객 만족 시대를 열어가고 있으며 인근 하상 도로와 주차장을 접하고 있어 접근성이 용이한 지역이다.

또한 서대전가구거리, 은행동 젊음패션거리, 목동 · 중촌동 맞춤패션거리, 문창 · 대흥 오토바이거리, 충무 자동차특화거리, 부사동 인삼 · 약초거리, 오류동 음식특화거리, 선화동 음식특화거리 등이 형성되어 있다.

선화동의 갤러리아 동백점, 은행동의 패션백화점앤비, 문화동의 백화점 세이, 까르푸, 오류동의 코스트홀세일 등 백화점, 할인점이 위치해 있다. 중심상권중의 하나인 신지하상가는 다양한 상품과 알뜰한 가격으로 고객에게 만족스러운 쇼핑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각 구역별로 의류(약 61%), 신발(7%), 악세사리(4%), 휴대폰기기(7%), 식음료(3%), 화장품(3%), 가방, 공예품, 수선점 등 기타 업종이 나머지를 차지하여 영업하고 있다. 그리고 문창재래시장, 오류재래시장, 유천재래시장, 태평재래시장, 산성재래시장, 용두재래시장 등이 있다.

관광

대사동 외 11개동 일원으로, 해발 457.6m인 보문산(寶文山)은 대전의 남쪽시 중심부에 근접해 있는 곳으로 보문산공원(면적 15.5㎢)에는 연재 송병선 선생 순국 기념비, 대전지구전승비 · 대전지구전적비 · 전망대 · 야외음악당 · 수영장 · 케이블카 · 어린이 놀이시설인 보문산 그린랜드 등이 있고 부근에 절이 많아 대전시민이 가장 즐겨 찾는 휴식공간이다. 사정동 사정공원 축구장 옆에 조성된 사정공원은 레포츠공원으로서 축구장, 롤러스케이트장, 배구장, 배드민턴장, 체력단련시설 등과 정자, 잔디광장, 인공호수, 약수터 등이 있어 시민 모두가 항상 즐겨 찾는 곳이다. 대흥동 대전시립도서관 뒷편에 자리한 테미공원은 1955년 11월 음용수 보안시설로 지정되어 일반 시민의 출입이 제한되어 왔으나, 1995년도에 이를 개방하여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려 도심 속에 조성한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진입로 3개 노선 280m, 순환도로 및 산책로 450m, 관리사무소, 체력단련시설, 편익시설, 화장실, 수경시설 등이 있고 문화행사로는 4월에 벚꽃축제가 있다. 국내에서 3번째로 큰 규모인 대전동물원이 있으며, 홍명상가 서편 광장에 조성된 홍명공원은 가족 또는 연인들이 주변의 백화점 등을 쇼핑한 후 휴식을 취하기 적합한 곳이다. 침산동 일원에 위치한 뿌리공원은 유등천 상류의 천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지역으로서 인근에 장수마을, 대전동물원, 청소년 수련마을, 신채호 생가 등과 연계된 종합휴식 공간뿐만 아니라 ‘효’를 주제로 한 테마공원으로서 청소년의 산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문화동 서대전 사거리 남쪽 편에 시원하게 펼쳐진 서대전공원은 대부분이 잔디광장으로 조성되어 있어 일반인들의 산책공원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각종 큼직한 야외행사에 이용된다. 경로휴양복지시설인 장수마을과 뿌리공원 내의 국궁장이 있다.

동(洞)
  1. 은행선화동(銀杏宣化洞)

북쪽으로 중촌동, 대전천 건너 동구의 중동 · 삼성동과 접경을 이루고, 동쪽으로 대전천을 경계로 동구의 원동과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 대흥동, 서쪽으로 목동 · 용두동과 접경을 이룬다. 중구의 북동부에 직교형의 가로망을 가진 도심지이다.

백제 때 노사지현에 속했으나 신라 때는 비풍군 유성현에 속하였으며, 고려 때는 공주부에 속했고 조선 초기에는 공주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때 공주군 산내면의 으능정이(은행정) · 바리바우(발암리) 지역이었는데, 1895년(고종 32) 회덕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대전군 대전면에 편입되었다. 1917년에 춘일정2정목(春日町二丁目) · 춘일정3정목(春日町三丁目)이라고 하다가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옛 이름 은행정의 이름을 따서 은행동, 충청남도 도청이 있으므로 각 도의 관찰사가 사무를 보던 곳의 이름인 선화당(宣化堂)의 이름을 따서 선화동이라고 하였다. 1970년에 선화동은 선화1동 · 선화2동으로, 그 뒤 다시 선화2동이 갈라져 선화2동 · 선화3동으로 분동되고, 1971년에 중부출장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 1977년 구제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었으며, 1998년에 은행동과 선화동을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남도청, 충남도의회, 대전고등법원, 대전지방법원, 대전고등검찰청, 대전지방검찰청, 충남지방경찰청, 대전국세청, 충남농민교육원, 국립농산물검사소 충청지사 등 공공기관이 있으며, 갤러리아 백화점이 있다. 충남도청은 2012년 홍성군 홍북면 충남대로로, 충남도의회는 2012년 예산군 삽교읍 도청대로로, 충남지방경찰청은 2013년 예산군 삽교읍 청사로로 이전하였다.

주요 간선도로는 동부를 가로지르는 중앙로와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종로와 도청 뒷길이 있다. 젊음패션거리, 으능정이 문화거리, 선화동 전문음식특화거리 등 전문화된 특화거리가 있어 볼거리, 살거리, 먹거리 등이 많은 상업의 중심 지역이다.

  1. 목동(牧洞)

북쪽으로 중촌동, 동쪽으로 선화동, 남쪽으로 오류동 · 용두동, 서쪽에 유등천(버드내)이 서구와 자연 경계를 이루는 중구의 서북부 지역이다.

목동은 백제시대에 우술군에 속했고 신라 때는 비풍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산내면에 속한 목골 또는 못골이라고 했는데, 1895년(고종 32)에는 회덕군 산내면 하룡리, 종촌리, 방축리, 목동리에 속하다가 1914년 대전군이 신설되자 이들 지역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외남면 방축리라 하였다. 1932년 대전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대전읍 목정(牧町)에 속하였고, 1935년 총독부의 대전부 설치로 대전부 목정이라 하다가 1946년 목동으로 개칭되었으며, 1949년 대전시의 신설로 대전시 목동이 되었다. 1977년 대전시에 구(區)제 실시로 중구 목동에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로 개칭되어 중구 목동에 편입되었고,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로 개칭, 중구 목동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1% 밖에 안 되며, 번화가는 동북쪽을 가로지르는 도로변과 동북쪽 사거리에 집중되어 있다. 대전KBS방송국, 대전출입국관리사무소, 산림조합 충남지부, 대전광역시 학생도서관 등의 공공기관이 있다. 을지의과대학병원, 선병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주요 간선도로는 동북부를 가로지르는 도로와 계룡로와 대종로 사이를 관통하는 도로가 있다.

저소득층이 많이 거주하고 빈부의 차가 심하며, 교육기관 및 종합병원 등 공공기관이 밀집하여 행정 접근성이 용이하다.

  1. 중촌동(中村洞)

동쪽에 대전천, 서쪽에 유등천이 감돌아 흘러 북쪽에서 합류함으로써 자연 경계를 이룬다. 동쪽은 동구의 삼성동, 서쪽은 서구의 탄방동 · 용문동과 경계가 되며, 북쪽은 동구의 오정동, 서구의 삼천동과 인접해 있고, 남쪽은 선화동 · 목동 · 태평동에 인접해 있는 중구에서 가장 북단의 지역이다.

공주군 산내면의 지역으로 산 중앙에 있다는 데서 또는 대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죽말 · 중말 · 중촌(中村)이라고 하였다. 1895년(고종 32) 회덕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촌(新村) · 목동(牧洞), 유등천면의 용두리(龍頭里) 각 일부 지역과 외남면 무릉리(武陵里)를 병합하여 중촌리(中村里)라고 해서 대전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대전부의 구역 확장으로 대전부에 편입되어 중촌정(中村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으로 고칠 때 중촌동으로 되었다. 1971년에 중부출장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가 1977년 구제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었다. 1991년 태평동의 일부 지역이 편입됨과 동시에 일부 지역을 목동에 넘겨주고, 목동의 일부 지역을 각각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25%이며, 번화가는 동남부를 관통하는 대종로변과 목동길 도로변에 집중되어 있다. 대전 보호관찰소, 한국가스공사 충청지사 등의 공공기관이 있으며, 주요 간선도로는 동남부를 가로지르는 대종로와 목동 뒷길 도로가 있다.

대전의 한가운데 중구의 최북쪽에 위치하였고, 대전천, 유등천의 합류지역이며, 대전선, 호남선철도가 관통하는 신흥개발지역으로 아파트 밀집지역(7개 단지로 동 인구의 75%)이다.

  1. 대흥동(大興洞)

북쪽으로 은행동 · 선화동, 동쪽으로 대전천, 남쪽으로 문창동 · 사동 · 대사동, 서쪽으로 용두동 · 문화동 · 유동과 접경을 이루는 중구 시가지의 동북쪽 지역으로 상업 · 업무의 중심 지구이다.

백제시대는 우술군, 통일신라시대에는 비풍군에 속하였다가, 조선시대에 공주목 산내면이었으며, 고종 32년에 회덕군 산내면 부처댕이 테미였다. 1914년 일본 총독부의 군 · 면 통합으로 동산마루, 부처댕이, 테미를 통합 대전군 외남면 대흥리로 되었다. 1917년 대전면이 지정면이 되어 대전군 대전면 대흥정이 되었다. 1949년 대전시로 승격되면서 대전시 대흥동이 되었으며, 1977년 구제 신설로 중구 대흥동이었다가 1989년 1월 1일부로 대전직할시 중구 대흥동이 되었다. 현재 대흥동은 법정동이고,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 1963년 1월 1일 대흥동은 대흥1동, 대흥2동, 대흥3동으로 각각 분동되었다가 1998년 1월 1일 다시 대흥동으로 통합되었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25%이며, 번화가는 중구청 앞 · 시청 앞 네거리에 집중되어 있다. 중구청, 근로복지공단 대전지역본부, 충남도교원단체연합회, 중부경찰서, 시립도서관 등의 공공기관이 있다.

중구청사가 소재한 동으로 상가, 학교, 병원 등이 밀집해 있고 배후에 비교적 오래된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으며, 도심 중심지역에는 으능정이 문화거리와 문화예술의 거리가 있어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가구 · 오토바이 특화거리와 유명 칼국수 거리 등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1. 문창동(文昌洞)

북쪽 · 동쪽은 대전천이 굽이져 흐르면서 동구와 자연 경계를 이루고, 서쪽은 부사동 · 대흥동, 남쪽은 석교동에 인접해 있는 중구의 동쪽 끝 지역이다.

1895년(고종 32)에 회덕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서쪽의 일부 지역을 떼어서 서구(西區) · 서동(西洞)이라고 하다가 대전군 외남면 부사리(芙沙里)와 대전면 본정(本町)이정목(二丁目)이라고 하였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문창동으로 개칭하고, 1970년에 문창1동 · 문창2동으로 분동되었으며, 1971년에 출장소를 설치함에 따라 중부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 1977년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에 일부 지역이 대흥동으로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쪽 대전천의 하천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주거지역이며, 임야는 없다. 번화가는 중앙부를 관통하는 대종로변과 북쪽을 가로지르는 충무로변에 집중되어 있다. 대전천변에 인접한 주거 상업 지역으로 재래시장(문창시장)과 오토바이 거리 및 숙박 시설이 들어서 있어 소규모 상거래가 활발한 지역이다.

  1. 석교동(石橋洞)

북쪽 · 동쪽에 대전천이 감돌아 흘러 문화동과 동구의 효동과 자연 경계를 이루고, 남쪽에 구릉이 둘러 있어 동구의 이사동과 접경을 이루며, 서쪽에 보문산(457.3m)의 연봉이 솟아 있어 부사동 · 대사동과 경계를 이루는 중구의 동남쪽 구릉지대이다.

마을 앞 대전천에 돌다리가 있었으므로 돌다리 · 석교(石橋)라고 하였다. 1895년에 회덕군 외남면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세동(細洞)을 병합하여 석교리(石橋里)라고 해서 대전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 대전부 구역 확장으로 대전부에 편입되어 석교정(石橋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석교동으로 개칭하였다. 1963년에 호동(虎洞) · 옥계동(玉溪洞)을 통합하고, 1971년 출장소 설치에 따라 중부출장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가, 1977년 구제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석교동은 3개 법정동(석교동 · 호동 · 옥계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문산과 대전천에 인접하고 옥계로를 중심으로 양 측면에 길게 발달된 전형적인 주거지역이다. 대규모 APT단지 없이 240여 개의 저층(5층 이하) 연립주택 위주로 형성되어 있다.

  1. 대사동(大寺洞)

북쪽에 대흥동, 동쪽에 미사동과 접경을 이루고, 남쪽에 보문산(457.3m)이 솟아 있으며, 서쪽에 문화동과 인접해 있는 중구의 동남쪽 분지 지역이다. 특히 남쪽 보문산 기슭에 보문산공원과 불교 유적이 남아 있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다.

1895년(고종 32)에 회덕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산리(垈山里) · 목척리(木尺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사리(大寺里)라고 하여 대전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 대전읍제 실시로 대전읍의 지역이 되어 대사정(大寺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대사동이 되었다. 1971년에 중부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가 1977년에 구제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었으며, 1991년에 일부 지역을 대흥동과 부사동에 넘겨줌과 동시에 대흥동의 일부 지역을 편입하고, 1993년에 또 일부를 대흥동에 넘겨주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거에 비하여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편이며, 번화가는 중앙부를 관통하는 보문로변 · 보문 5거리에 집중되어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북부를 가로지르는 충무로 · 중앙부를 관통하는 보문로가 있다. 보문산공원이 위치하고 있어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이 찾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한밭종합운동장과 서쪽으로는 농협중앙회 충남지역본부가 인접해 있고, 충남대학교 부속 병원이 있다. 특히 보문산공원에는 많은 국가유산 및 사찰 약수터가 있어 주민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다.

저소득층 · 노인층이 비교적 많이 거주하고 빈부 격차가 심하며, 보문산 공원이 동 면적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1. 부사동(芙沙洞)

북쪽으로 대흥동, 동쪽으로 문창동, 남쪽으로 석교동 · 대사동, 서쪽으로 대사동과 접경을 이루는 20∼100m의 낮은 구릉지대이다.

조선시대 공주군 산내면의 지역으로 부사 · 부사리(芙沙里)라고 하였는데, 1895년(고종 32)에 회덕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대리(場垈里)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부사리라고 해서 대전군 외남면에 편입되었다. 1932년 대전읍 구역 확장에 따라 대전읍에 편입되어 보문정(寶文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부사동으로 개칭하였다. 1977년 출장소가 설치됨에 따라 중부출장소의 관할 지역이 되었다가 1977년 구제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었다. 1991년 석교동 · 대사동의 각 일부 지역을 편입하고, 일부 지역은 문창동에 넘겨주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1%로 낮은 편이며, 번화가는 북부를 관통하는 보문로변에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문창동과 부사동 사이의 옥계로와 보문로가 있다. 종합 운동장을 주변으로 각종 운동경기 및 부사칠석놀이 등의 문화행사가 활발하게 열리는 문화의 중심지역이다. 고지대 저소득층 밀집지역으로 상업, 회사원, 일일노동자 등 인구구성이 다양하다.

  1. 용두동(龍頭洞)

북쪽으로 목동 · 선화동과 인접해 있고, 동쪽과 남쪽으로 대흥동과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 오류동과 인접한 중구 북부 지역이다.

백제시대에 우술군, 신라때 비풍군 지역에 속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는 공주목 유등천면에 속해 있었다. 용두동은 용두봉의 모양이 용머리에 해당된다 하여 용머리, 용두리로 불렸다. 1895년 회덕군 유천면 용두리, 반심리, 평리 지역이었는데,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탄방리, 중촌리, 방축리 등의 일부를 편입하여 대전군 유천면 용두리가 되었다. 1932년 대전군 대전읍 용두정에 편입되었으며, 대전부 설치로 1935년 대전부 용두정이 되었다. 1949년 시승격으로 대전시 용두동에 편입하였고, 1977년 구제 실시로 중구 용두동이 되었으며, 1989년 1월 1일 직할시 승격으로 대전직할시 중구 용두동으로 편입되었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10% 정도이며, 번화가는 서부를 동남쪽으로 가로지르는 계룡로변에 집중되어 있고, 을지의과대학교가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서부를 동남쪽으로 관통하는 계룡로와 남부를 가로지르는 계백로가 있다. 대전광역시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서대전4가와 인접한 교통의 요지이며, 용두시장, 서대전 가구거리 등이 있는 경제의 중심지역이다.

  1. 오류동(五柳洞)

북쪽은 태평동 · 목동과 인접하고, 동쪽으로 대흥동에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 문화동, 서쪽으로 유천동 · 태평동에 인접한 직교형 시가지를 이루는 도심 지역이다.

가리지기들에 새로 생긴 마을이므로 새말 · 신촌 · 가리지기라고 하였는데, 1895년(고종 32)에 회덕군 유등천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신촌리(新村里)라고 해서 대전군 유천면의 평리(坪里)에 편입되었다. 1932년 대전읍 구역 확장에 따라 대전읍에 편입되고, 1935년에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부의 지역이 되어 유정(柳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오류동으로 개칭하였다. 1963년에 태평동(太平洞)을 통합하였다가 그 뒤 다시 분리하고, 1971년에 서부출장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가 1977년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평동의 웃벌(상평)에 이어지는 가리지기 등 넓은 들이 있었으나, 택지 개발로 주택과 건물들이 들어서서 임야는 전혀 없고, 번화가는 동쪽 계룡로변과 남쪽 계백로변이 있다. 에너지관리공단 대전 · 충남지사 등 공공기관과 경부선 철도의 서대전역이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남부를 가로지르는 계백로와 동남부를 관통하는 계룡로가 있으며, 서쪽에 경부선의 철도가 지나간다.

대형아파트와 일반주택이 혼재하는 지역으로 주민의 2/3가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으며, 금융기관, 상가, 대형빌딩이 밀집한 상업중심지역이다.

  1. 태평1·2동(太平一 · 二洞)

서 · 북쪽에 유등천이 흘러 목동 · 중촌동, 서구의 가장동 · 용문동과 자연 경계를 이루고, 동쪽에 오류동 · 용두동이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 유천동과 접경을 이루는 중구의 서북부 유등천변의 지역이다.

조선시대 공주군 유등천면의 지역으로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 또는 평리(坪里)라고 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회덕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수침리(水砧里) · 하평리(下坪里) · 신촌(新村) · 상평리(上坪里) · 용두리(龍頭里), 청내면 탄방리(炭枋里), 산내면 중촌(中村) · 방축리(方丑里)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평리(坪里)라고 해서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에 대전부의 구역 확장으로 대전부에 편입되어 대평정(大平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태평동이라고 하였다. 1971년에 서부출장소의 관할 구역이 되었다가 1977년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고, 1983년에 태평1·2동으로 분동되었으며, 1991년, 1993년에 일부 지역이 유천동에 각각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태평동 일대는 원래 벌판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피혁과 직물 등의 공장들이 들어서며 발달하였다. 근래에는 농기구 · 제지 · 시멘트 · 슬레이트 공업의 공장들이 들어섰으나 공해 문제로 정체 상태에 있고, 최근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임야는 전혀 없다. 주요 간선도로는 동남부를 가로지르는 계백로와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국도가 있으며, 동쪽에 경부선이 지난다.

태평1동은 동쪽으로 호남선 철로에 인접하고 동서로와 태평로가 교차하면서 접근성이 용이해져 아파트와 대형상가 건물이 증가하고 있어 태평재래시장과 함께 점차 상업중심지로 변모하고 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날은 전통 축제인 목신제가 열리고 있다. 대부분 서민층이 거주하는 주거지역이며 아파트 주민이 과반수(68%) 이상이다.

태평2동은 유등교에서 수침교까지 유등천을 따라 위치한 쾌적한 주거지역이며, 대전 최초로 조성된 아파트단지지역으로 아파트단지 세대가 87%에 달하게 된 공동주거지역이다. 또한 유등천 우안 도로가 개설되고, 가장교가 확장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1. 유천1·2동(柳川一 · 二洞)

북쪽으로 태평동에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 오류동 · 문화동과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 산성동 · 문화2동과 인접해 있고, 서쪽에 버드내(유천)가 감돌아 흐르는 중구의 서부 지역이다.

조선시대 공주군 유등천면의 지역으로서 서쪽에 감돌아 흐르는, 금강의 지류인 버드내(유등천) 냇가이므로 버드내 · 유등천(柳等川) · 유천(柳川) · 유천리(柳川里)라고 하였는데, 1895년(고종 32)에 회덕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창리(倉里) · 중평리(中坪里) · 상평리(上坪里) · 당대리(唐垈里)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유천리라고 해서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고, 유천면의 소재지가 되었다. 1935년에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되면서 신설된 대덕군 유천면의 지역이 되었는데, 1940년에 대전부의 구역 확장으로 대전부에 편입되어 유천정(柳川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 일본식 동명 개정에 의하여 유천동이라고 하였다. 1971년에 서부출장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가 1977년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고, 1982년에 시조례로 유천1·2동으로 분동되었다. 1991년과 1993년에 각각 태평동의 일부 지역을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천1동 계백로에서 유천2동과 산성동에 이르는 곳을 ‘웃벌’(상평), 유천2동에서 태평초등학교 건너편에서 계백로에 이르는 곳을 ‘가운데벌’(중평), 태평1동 태평초등학교 부근에 ‘아랫벌’(하평)이라는 넓은 들이 있었으나, 택지 개발로 직교형 도로망을 가진 시가지를 이루고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임야는 전혀 없고, 번화가는 유천동 북부를 가로지르는 계백로변에 있다.

서부종합상가, 유천종합시장이 있으며, 지리적으로는 호남의 교통 요충지이자 관문으로 서부터미널이 위치하고 있다. 주민들의 분포는 유천종합시장, 서부종합시장 및 유흥밀집 지역으로 다수의 상업인구와 단독세대로 구성되어 있다.

유천1동은 호남의 관문인 서부터미널이 위치하고 있으며, 유천종합시장, 서부종합시장, 다수의 숙박 · 유흥업소 등이 밀집된 상업지역과 단독주택지역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유천2동은 주거지역으로서 빈부의 격차가 적다.

  1. 문화1·2동(文化一 · 二洞)

북쪽으로 오류동, 동쪽으로 대사동, 남쪽으로 산성동, 서쪽으로 유천동과 경계를 이루는 중구의 서남쪽 도심 지역이다.

조선시대에 공주군 유등천면의 지역으로서 과례(果禮) · 과례리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천근리(天根里) · 옥산리(玉山里) · 노산리(老山里) · 모산리(牟山里)를 병합하여 과례리(果禮里)라고 하여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대전부의 실시로 일부 지역이 대전부 문화정(대전부 문화정), 잔여지역은 1940년 대전부 연병정(대전부 연병정)으로 편입되었다가 1946년 문화동으로 개칭하였다. 1971년에 대전시 서부출장소의 관할 지역이 되었다가 1977년에 구제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었다. 1985년에 문화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거에 비해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9%로 높은 편이며, 번화가는 북부를 가로지르는 문화로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주요 간선도로는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문화로가 있다.

문화1동은 교육 · 문화의 중심지로 초 · 중 · 고등학교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한밭도서관, 시민회관, 중구문화원, 대전일보 등이 있으며, 대단위 기관 단체로 충남도교육청, 대전 · 충남지방병무청, 대전지방보훈청, 한국산업인력공단충청지역본부 등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주민의 휴식 및 편리를 위한공간으로 서대전시민공원, 청년의광장, 문화광장 등이 있다.

문화2동은 보문산 자락에 위치한 지역으로 일반주택(44%)과 아파트(56%)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살고 있으며, 상업지구가 형성되지 않은 도심속의 촌락으로 등산로, 약수터, 도서관, 보건소, 동물원 등의 주민편의시설이 있다.

  1. 산성동(山城洞)

북쪽에 높고 낮은 구릉들이 둘러 있어 문화동, 서구의 복수동 · 정동, 동쪽에 오도산(336m)이 솟아 있어 동구와 접경을 이루고, 남쪽에 느나미재 · 천비산(465.6m)의 연봉이 둘러 있어 금산군 복수면, 서쪽에 안산(264.1m) · 새고개 너머로 서구, 금산군 복수면과 자연 경계를 이룬다. 동 · 서 · 남쪽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중앙부를 금동천 · 장생천의 맑은 물이 흐르는 산수가 아름다운 지역이다.

조선시대 공주군 유등천면의 지역으로 당대 · 당리 · 당대리(唐垈里)라고 하였는데, 1895년(고종 32)에 회덕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가척리(加尺里) · 탑동리(塔洞里) · 원대리(遠垈里)를 병합하여 당대리라고 하여 대전군 유천면에 편입되었다. 1940년에 대전부의 구역 확장으로 대전부에 편입되어 산수정(山水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성재(사정산성) 아래가 되므로 그 뜻을 따서 산성동이라고 개칭하였다. 1963년에 대전군 유천면의 사정리(沙亭里) · 복수리(福守里) · 안영리(安永里)가 편입되면서 리(里)를 동으로 고쳐 산성 · 사정 · 복수 · 안영의 4개 법정동을 관할하다가, 1971년 출장소 설치에 따라 서부출장소의 관할구역이 되고, 1977년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에 편입되었다. 1985년에 복수동이 독립하였다가 1988년에 안영동과 함께 신설된 서구(西區)에 이관되었는데, 1989년에 대전시가 대전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안영동을 다시 넘겨받아 안영동 · 사정동 · 산성동의 3개 법정동을 관할하다가 1998년에 행정동인 산서동(山西洞)을 통합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행정동인 산성동은 법정동인 산성동 · 사정동 · 안영동 · 무수동 · 구완동 · 침산동 · 목달동 · 정생동 · 어남동 · 금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야가 차지하는 비율이 약 75%가 되며, 산성동안영동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구금산군 국도변에 있다. 대부분의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고, 산성동을 가로지르는 안영동~구완동에 남부순환 고속국도를 건설공사 중이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동지지(大東地志)』
『택리지(擇里志)』
『중구통계연보』(대전광역시 중구, 2008)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한국지리』지방편(권혁재, 법문사, 1996)
『대전시사』(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2)
『한국지지』지방편Ⅱ(건설부국립지리원, 1984)
『대전시지』(대전시지편찬위원회, 1984)
『한국의 발견 충청남도』(뿌리깊은나무, 1983)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한국지지』총론(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충남의 맥락』(충청남도, 1983)
『한국민속대관』1~6(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80)
『충청남도지』(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1979)
『대전시주변부락의 민속신앙연구』(박계홍, 문화인류학 6, 1973)
『한밭승람』(변평섭, 호서문화사, 1972)
『충남의 관광자원』(충청남도관광협회, 1966)
『충청남도관광개발안』(충청남도관광협회, 1964)
『조선각도읍지』(박문사, 1929)
『대전대관』(대전면사무소, 1928)
대전광역시 중구(www.djjunggu.go.kr)
관련 미디어 (2)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