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 ()

은평구청
은평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서울특별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구.
정의
서울특별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구.
개관

서북쪽은 경기도 고양시, 동쪽은 종로구, 남쪽은 서대문구와 마포구에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6°52'~126°57', 북위 37°34'~37°39'이다. 면적은 29.70㎢이고, 인구는 49만 7920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6개 행정동(11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녹번동에 있다.

자연환경

서남쪽을 제외한 대부분이 백련산(216m)과 비봉(560m) 및 삼각산 줄기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동쪽에서 북쪽으로 삼각산 주능선과 의상봉 능선이 뻗어 있으며, 안쪽으로 응봉 능선이 있다. 북쪽에서 서쪽으로 서오릉의 진산인 효경산·봉산 줄기가 형성되어 있다. 남쪽으로 족두리봉(수리봉)에서 백련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탕춘대능선이 뻗어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고 있다. 그 사이에 삼천사계곡과 진관사계곡이 창릉천으로 합류되는데, 구의 외곽을 우회하여 한강으로 유입된다. 향림담계곡은 불광천을 이루며 녹번천과 합류하여 하류지역에서 홍제천과 만나 서대문구·마포구와 경계를 이루며 한강으로 유입된다. 구의 중앙을 흐르는 불광천 주변이 비교적 평탄한 개활지를 형성하여 시가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백련산의 서사면은 산록완사면이 발달해 있어, 근래 신흥주거지역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불광천을 합류한 홍제천과 창릉천 사이에는 난지도 갯벌이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폐기물 매립지가 되어 하늘공원·노을공원의 인공 산으로 조성되어 있다.

지질은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화강암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화강편마암과 호상편암이 부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은평구의 북동부는 수리봉·향로봉·비봉·문수봉으로 이어지는 삼각산의 주능선과 나한봉·나월봉·증취봉·용혈봉·용출봉·의상봉의 상봉능선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갈라진 응봉능선·탕춘대능선과 백련산 줄기 및 효경산·봉산 줄기의 높고 낮은 봉우리가 연이어져 있다. 그리고 삼각산 일대에서 발원한 창릉천과 불광천이 한강에 유입된다. 향림담계곡의 물줄기가 흘러 형성된 불광천이 구의 중심을 흐르면서 녹번천과 합류하는데, 다시 도시계획에 따라 인공적으로 홍제천에 합류시켜 한강으로 흐르게 하였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도시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3.3℃, 1월 평균기온은 0.4℃, 8월 평균기온은 26.5℃, 연 강수량은 1212.3㎜이다.

역사

은평구 지역에서 선사문화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인근 고양시 일산 일대의 선사시대 농경유적 등을 통하여 볼 때 인근 한강변의 은평구 일대에도 선사시대에 인류가 살았을 개연성은 높다. 은평구를 포함한 한강 유역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진국(辰國)과 삼한사회의 마한(馬韓) 그리고 초기 백제였다. 서기전 1세기 말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한강 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생산 활동과 인구 증가를 이루었고, 보다 큰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475년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남평양이 설치되었다.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래 신라 삼국통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전국에 9주를 설치했고 용산구를 포함한 서울 지방은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은평 지역을 포함한 서울 지방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면서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의 활동으로 태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관련유적으로 종로구와 경계를 이루는 삼각산 비봉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사적, 1972년 지정)가 있다.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940년(태조 23)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고 주·군·현를 개칭함에 따라 한양군이 양주(楊州)로 편제되면서 은평 지역은 양주 관할구역이 되었다. 성종 14년 도제(道制)가 실시되어 양주는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고, 절도사가 배치되어 좌신책군(左神策軍)이 되었다. 현종 9년에 양주가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고, 1067년(문종 21) 양주는 남경으로 승격되어 고려 삼경제의 하나로 운영되었으며, 1069년에 신경기(新京畿)에 편입되었다. 그 후 다시 양주가 되었다가 1104년(숙종 9)에 다시 연흥전·천수전 등의 궁궐 건물이 마련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경기좌도에 속하여 과전과 공신전의 반급지역이 되었다. 은평 지역에는 고려시대 지방을 잇는 22도의 하나인 청교도(靑郊道)의 한 역인 영서역(迎曙驛)이 있어 노원역, 청파역과 이어졌다. 그리고 진관사와 삼천사는 고려시대 삼각산의 대표적인 사찰이었고, 폐사지로 신혈사와 향림사의 존재도 확인된다. 특히 향림사는 거란의 침입 때 태조 왕건의 재궁을 두 번이나 피신시킨 곳이다.

1394년(태조 3)에 한양부로 도읍을 정하여 한성부로 고치고 서울지역은 5부 52방으로 개편했는데, 지금의 은평구 지역은 북부의 성외인 연은방·상평방 지역에 해당되었으며, 은평구의 이름은 이 두 지명을 합성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1789년 은평구 지역에 해당하는 상평방·연은방의 호구를 살펴보면, 상평방은 560호에 1,939명, 연은방은 631호에 1,876명으로 당시 한성부 인구 약 20만 명의 2%에 해당되었다.

은평 지역은 서울에서 서북지방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길목으로 그 중요성이 크게 대두되었다. 이 길은 흔히 의주로라고 불렸으며, 가깝게는 고양에 이르는 고양길이라 하였다. 중국 사신이 오고, 조선 사신이 가는 사행길로서 홍제원에서 덕수원·벽제역 사이에 있던 은평구 지역은 정치적·외교적·군사적·문화적으로 중요한 길목이었다. 그리고 임금이 서삼릉이나 서오릉에 행차하는 능행길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피난로가 되었다. 그리고 인조반정이나 이괄의 난 때는 반정군이나 반란군이 집결하고 접근하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의주로상에 있던 영서역·금암발참 등의 존재에 따라 인조별서유기비와 금암기적비가 세워지게 되었고, 구파발·연서로 등의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또 고양 땅에 서오릉이 위치하게 되자 그 원찰로 수국사가 건립되었고, 도성에 가까운 교외지역으로 왕실의 화의군파·영산군파·무산군파의 묘역이 자리 잡고, 내시 묘역 일군이 위치하게 되었다.

1910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고, 1911년 경성부에 성안은 5부 35방, 성 밖은 8면제를 시행하면서 은평구 지역은 성 밖의 은평면에 속하였고, 1914년에 은평면은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확장함에 따라 은평면의 일부인 홍제외리·홍제내리·부암리·홍지리·신영리 등 5개 리가 생기고, 현재의 서대문구·종로 지역 일부가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이곳에 1940년 7월 서부출장소가 신설되었다가 1943년 구제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로 개편되었다. 한편 오늘날 은평구지역은 1949년 8월 13일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될 때까지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으로 남아 있었다.

광복 후 1946년 9월에 경성부가 서울시로 되었고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다. 1949년 8월 고양군 은평면 11개 리, 연희면 7개 리가 서대문구에 편입되어, 은평출장소 행정 관할이 되었다. 1973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관내 구파발리와 진관내·외리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어 은평구의 행정 관할이 되었다. 1979년 10월 1일 은평출장소가 폐지되고, 서대문구에서 분구되어 은평구가 신설되었으며, 이때 은평구는 녹번, 불광1, 불광2, 갈현, 구산, 대조, 응암1, 응암2, 응암3, 역촌, 신사, 증산, 수색, 진관내, 진관외동의 15개 행정동을 관할하게 되었다. 1988년 5월 1일 지방자치제를 실시함에 따라 희망에 찬 주민들이 살아가는 전원도시가 되었으며 1989년 9월 1일 이후 20개 행정동에서 13개 법정동을 관할하는 구가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 불광 지구와 역촌 지구의 대단위 구획정리사업이 시작되어 1978년에 완료됨에 따라 은평구 일대의 농경지는 거의 택지로 변하였다. 이후 1990년대에 들어 수도권 정비계획법에 따라 제조업체가 늘어났다. 그리고 서울외곽의 주거지역이 된 은평구는 지역 시장을 기반으로 한 소규모 상권이 형성되어 소규모 점포가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연신내 일대에 서울 서부지역의 최대의 패션·의류타운이 형성되었다. 나아가 은평뉴타운 지역으로 개발되었으며, 수색역 일대의 백화점 유치 등으로 새로운 역세권이 형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유물·유적

조선 세종의 제9왕자로 단종 때 충신인 화의군 이영 묘역(서울특별시 기념물, 2005년 지정)이 진관외동에 있다. 그리고 인근 재촌에 성종의 제13왕자인 영산군의 묘소가 있으며, 진관내동에는 성종의 제12왕자 무산군파의 묘역으로 무산군의 손자인 화릉군의 묘가 있다. 한편 진관내동 산27-2호 일대에는 내시묘역이 집단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가장 크고 오래되었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한 내시묘역이다. 이 묘역은 이사문공파(李似文公派)의 내시 분묘 45기가 모여 있는 문중 묘지이다. 그 외에 진관외동 이말산 자락에 영조의 외조부이자 숙빈최씨의 아버지인 최효원의 묘역이 있으며, 진관내동 못자리골에는 영천이씨 묘역이 있는데 선조 때 호조판서를 지낸 이린과 이선 형제와 후손들의 묘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의 동북쪽 경계가 되는 삼각산 의상봉 능선에는 북한산성(사적, 1968년 지정)이 축조되어 있다.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 37)에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삼군문에서 축조하였으며 전체둘레는 12.7㎞에 달하고 성벽에 둘린 체성의 길이는 8.4㎞이다. 은평구 쪽으로 가사당암문·부왕동암문 등이 있으며, 고양시 관할구역인 대서문으로 통한다.

은평구는 삼각산 자락에 있어, 고려시대부터 신혈사·진관사(津寬寺)·삼천사(三川寺)·수국사·사현사(沙峴寺)·향림사 등 많은 사찰이 자리하고 있어 문화유적이 많다. 특히 삼천사에는 옛 삼천사터의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며, 현 삼천사에는 서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보물, 1979년 지정)이 있다. 이 지역의 유형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사현사에는 사현사 석불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1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진관사 내에는 진관사 소 삼존불상(석가불, 미륵불, 제화갈라보살)(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2년 지정)·진관사 소 십육나한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2년 지정)·진관사 영산회상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2년 지정)·진관사 십육나한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2년 지정), 진관사 칠성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2년 지정)·진관사 명호스님 초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2년 지정)·진관사 산신도(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2002년 지정)이 있다. 그 외에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진관사 석불좌상(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2002년 지정), 진관사 소 독성상(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2002년 지정)·진관사 독성도(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2002년 지정)가 있다.

삼각산 비봉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가 있는데, 본 비석(국보 제3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최근에 본래 모습으로 복원된 비석이 세워졌다. 또 진관내동에 금암기적비(黔巖紀蹟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호)가 있다. 창릉천 변 금암별참 자리에 있는데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부왕인 숙종의 명릉을 다녀오면서 가난하여 도적이 된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외 흥창사은언군묘갈, 숙용심씨묘표 등이 있다.

은평구는 사행로와 관련하여 사신성황당이 있고, 그 외 금성당, 박석고개 성황당 터, 천부지모제단비, 아기바위 등이 있다.

또한 은평구에는 선소리산타령(국가무형문화재, 1968년 지정)·가사(국가무형문화재, 1971년 지정)·가곡(국가무형문화재, 1969년 지정)·영산재(국가무형문화재, 1973년 지정)의 국가무형문화재가 있고, 궁시장·배접장·중장 등의 무형문화재도 있었다.

새장골보호수 느티나무 3주, 중골보호수 느티나무, 제말보호수 느티나무 3주, 진관사보호수 은행나무 1그루와 느티나무 3주, 수색역보호수 가중나무 4주가 있다.

교통로와 관련하여 연서역유지, 금암참지, 봉산봉수대지가 있다.

교육·문화

은평구는 삼각산의 서쪽 자락에 위치하여 넓고 푸른 자연환경과 공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울외곽 지역으로 청소년유해업소가 적어 교육환경이 좋은 편이다. 은평구에 교육기관이 자리 잡은 것은 1928년 진관외동의 신도초등학교, 1931년의 은평초등학교, 1935년 수색초등학교 등이 개교하면서부터이며, 그 후 초등학교를 비로한 중등교육기관이 자리하게 되었다. 근래에는 교육여건의 변화에 따라 숭실중·고등학교와 서울기독대학교 등이 1975년과 1985년에 도심지역에서 이전해 오기도 하였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30개교, 중학교 18개교, 고등학교 18개교, 특수학교 1개교와 서울기독대학교 및 국방대학교 등이 있다. 은평구립도서관과 은평도서사랑방이 있어 사회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문화예술의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은평문화원과 은평문화예술회관 등이 있다. 은평문화예술회관은 대규모 공연장으로 각종 공연행사와 전시회, 문화강좌 등에 활용되고 있으며 다양한 교양·전문강좌와 국악대공연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은평문화원은 1998년에 창립되어 활발한 문화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역특성문화사업 지원·은평백일장·미술 및 서예전시회, 구민위안의 밤, 소식지 은평문화와 은평문예 발간 등을 통하여 구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있다. 또 청소년수련관은 복합문화공간 겸 체육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은평문화의 집은 주민의 문화활동 참여를 활성화시키고 있으며 음악감상, 공연, 연극, 영화상영 등을 비롯하여 문화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영화관으로 도원극장, 드라이브인양평극장, 스타소극장, 한복시네마 등이 있으며, 화랑과 화실도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문화단체로 은평구립합창단, 은평문인협회, 은평미술인협회가 있으며 문화축제행사로 통일로파발제, 매바위축제, 연천마을 호국기원제, 역말기원제 등이 있다.

은평구는 삼각산이라는 명산이 있어 산기슭인 불광동·진관내동·진관외동에 불교사찰이 밀집되어 있으며, 주거·상업지역인 응암동·역촌동 일대에는 기독교 교회가 상대적으로 밀집되어 있다. 불교는 진관사·삼천사·수국사·사현사·백련사 등 긴 역사를 지닌 전통사찰을 비롯하여 조계종·태고종·법화종 사찰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기독교회는 1931년 응암교회 설립 이후 급속히 발전하여 수색장로교회·수색감리교회·은평감리교회·은평성결교회 등 유서 깊은 교회가 활동하고 있으며, 장로교·감리교·성결교·침례교·순복음교회가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천주교회는 1957년 수색동천주교회가 설립된 이후 불광동·응암동·구파발·역촌동·녹번동·갈현동천주교회가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 외 원불교·통일교·대순진리회 등의 종교시설이 있다.

은평구립합창단에서는 가곡과 민요를 내용으로 하는 정기공연을 개최하며, 청소년 통일음악제에서는 관현악과 보컬팀 연주(중학생), 독주·중창단·보컬팀 공연(고등학생) 등이 개최된다. 그 밖에 은평문화원·은평문화예술회관·문화의 집 등에서 은평구립어린이집 그림그리기대회, 은평백일장, 송년음악회 등 문화예술행사가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은평구민체육센터가 2002년 완공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은평청소년수련관에는 체육관·수영장을 비롯한 전시실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외 증산동 생활체육광장·다목적운동장과 은평구 축구장 등이 있으며, 근린공원에도 생활체육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한편 은평구 체육회와 생활체육협의회의 주최로 은평구민한마음체육대회가 구민의 날에 개최되고 있으며, 은평구민함께걷기대회가 열리고 있다.

민속

세시풍속이란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되풀이되는 의례속인 풍속을 말한다. 세시풍속은 생활과정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활력소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연대감과 민족의 생활 속에 훈훈한 인정과 토속적인 정취를 이어왔다.

세시풍속은 일정한 시기에 주기적·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연중행사인데, 주로 명절에 따라 행해진다. 설날의 세배·성묘, 정월대보름날의 부럼·오곡밥·귀밝기술과 묵은나물먹기, 한식날의 사초와 성묘, 삼짇날의 답청, 초파일의 연등회, 단오날의 창포에 머리감기, 유두날의 머리감기와 시절식 천신, 삼복의 탁족, 칠석의 밀고사, 백중의 호미씻는 날, 추석의 차례·성묘, 시월 시향 제사, 동짓날 팥죽먹기, 12월 제야의 폭죽와 묵은세배 등이 행해졌다.

구파발 일대에 전승되던 구파발 산대놀이가 있는데, 이는 서울본산대놀이의 한 유파로 서울 근교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이었다. 또 구파발에는 꼭두각시놀음이 유명한데, 이 놀음은 마을 단위로 전승되었고 마을 제사나 잔칫날 또는 겨울철 농한기에 각 마을을 돌며 공연하였다. 한편 구파발 지역에는 단오놀이가 성대히 행해졌다. 인근 주민들은 연신내(불광천) 근처에 모여 씨름·그네뛰기·활쏘기 경연과 구경이 성황리에 놀이되었다. 따라서 활 쏘는 사정(射亭) 마을이 ‘새장골’이라는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민간에서 길흉화복이 이어지면서 현생의 부귀와 저승의 편안함을 기원하는 바램은 각종 굿거리로 남아 전하고 있다. 특히 마을을 지켜주는 신에게 마을 사람이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는 도당제가 전승되고 있다. 도당제는 유교풍의 제사가 끝나면 굿을 진행하는데 불광동의 새장골도당제처럼 대개 제석거리, 별성거리, 성주거리, 궁웅거리, 성황거리, 칠성거리, 대감놀이, 신당놀이, 도당대받이 등 12거리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굿은 역촌동 역말도당제, 증산동 도당제 등에서 큰굿을 행하고,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에게 소지를 태우며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반홍산산신제와 이말산산신제가 행해지고 있다.

설화·민요

은평구 불광동 독박골에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 큰 공을 세운 원두표 장군과 관련된 옛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두표 장군이 바위굴 근처에 머물면서 타인의 접근을 금지하기 위하여 염병을 고치러 왔다고 둘러댄 것을 본보기로 하여, 반정을 모의하였던 사람들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염병이 걸렸다고 둘러대어 거사의 암호를 ‘이제 병 고치러 가세.’라고 하였다고 한다.

불광동 연신내에는 산림감수 이야기가 전한다. 악의없는 거짓말을 잘하여 동리 사람들을 웃기거나 종종 골탕을 먹이는 고씨(高氏)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모내던 사람들이 박서고개 개천가를 지나는 고씨를 불러 놓고 ‘거짓말이나 한 마디 하고 가게’하고 청하였다. 이때 고씨는 ‘군(郡)에서 산림감수가 나왔다는데, 나도 이렇게 한가히 이야기할 때가 아니야.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는 총총히 사라져버렸다. 이때 고씨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만 먹던 밥 사발을 던져버리고, 제각기 자기 집쪽으로 급히 돌아갔다. 땔감으로 생나무를 한 것이 걸리면 곤욕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림감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고씨에게 감쪽같이 속은 것을 알아차렸다. 한창 바쁜 모내기철에 헛시간을 보낸 마을 사람들이, 그 후 고씨를 만나자 모두 원망하였으나, 고씨는 “그게 내 잘못이오?”라고 했다고 한다.

신사동 고택골 명당 이야기가 있다. 도장을 파는 직업으로 가난하게 살던 이주경이란 사람이 꿈속에서 나타난 하얀 도포 입은 노인이 정해주는 무악재 고개 넘어 고택골 앞에 부친의 시신을 안장한 뒤에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버지를 안장하고 돌아오던 날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토지에 대한 측량령을 내려 많은 사람들이 측량할 자기 땅문서에 찍을 도장을 만들려고 도장 가게 앞에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구파발동에는 구파발 대장간들이 임진왜란 당시 평양으로 피난하던 선조를 위기에서 구했던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거운 쇳덩이를 제작하여 왜군이 쫓아오는 길목에 놓고, 아군은 가짜 쇳덩이를 솜뭉치로 만들어 가볍게 들고 가게 하여, 조선 군사들이 천하장사처럼 보이게 하여 추격을 늦추었다고 한다.

불광동에는 임진왜란 때 삼각산 노적봉을 마치 쌀가마니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창릉천에 석회를 풀어 쌀 씻은 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격퇴하게 하였다는 밥할머니 이야기가 전한다. 밥할머니는 불광동 즉 연신내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산 아래 부근에서 대대로 집성촌으로 살아온 해주오씨(海州吳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남달랐고, 생김새는 키가 호리호리하고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또 밥할머니는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때에는 인근 마을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가 치마 위에 덧치마를 만들어 두르고 주변의 돌들을 치마폭에 담아 날라 행주치마의 설화를 낳게 하기도 하였다. 이런 혼란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밥할머니는 인근 동리의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아군들의 밥을 일일이 만들어 나눠주었고, 이런 연유로 오씨 할머니를 밥할머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밥할머니는 이후 전멸 위기에 놓인 아군을 구출한 슬기로운 사람으로 여겨져 민간에서 높이 추앙되었으며, 선조가 그 공적을 기려 창릉 모퉁이에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때 훼손되어 땅에 묻히기도 하였으나 광복 직후 다시 찾아 세웠는데, 1993년 고양시 삼송동 통일로 주변, 일명 숫돌고개 중턱의 도화공원 내로 1993년에 옮겼다. 밥할머니의 실제 묘가 불광동 150번지에 최근까지 있었으나, 1976년 자손들에 의해 화장되었다고 한다.

진관내동에는 상나무배기 우물이 하나 있는데, 물맛에 늘 향내가 배어 있고 도술을 부리는 금계수탉이 알을 낳는다고 하여 만병통치 약수라고 전한다.

진관내동에 여기소라는 연못이 있었다. 북한산성을 쌓을 때 공사를 감독하던 관원을 사랑하던 기생이 남장을 하고 찾아갔지만 면회금지로 만나지 못하자 연못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공사가 끝난 후 기생이 찾던 관원이 이 사실을 알고, 그 연못에 찾아가 ‘조금만 더 기다리지 참지 못하고 여기서 죽었단 말이오.’ 하면서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을 ‘너 여(汝), 여기 기(其), 못 소(沼)’의 뜻이 담긴 ‘여기소’(汝其沼)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진관내동 428번지에는 1781년(정조 5)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금암(黔岩)에서 행한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정조가 직접 글을 지었다고 한다.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다가 창릉천의 금암발참(黔岩撥站)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때 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소를 훔치다가 붙잡혔는데, 영조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참장(站長)에게 이르기를, “저 소도둑은 흉년을 맞아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농부에게 소가 없으면 무엇으로 농사를 짓겠는가? 참장이 비록 낮은 관직이나, 또한 직책을 맡은 것이니, 그대가 재량껏 처리하라.”고 하였다. 이에 참장이 소를 찾아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둑은 처벌하지 않았다. 다음날 영조가 한양에 도착하니, 이날 영조를 세제(世弟)로 책봉하였다는 것이다.

은평구 지역에는 장례 때 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꾼들에 의해 불려지던 상여소리와 시신을 땅에 묻고 달구지꾼들이 흙과 회를 다질 때, 선창자가 북을 치면서 선창하면 달구질하는 사람들은 달굿대로 묘를 다지면서 후렴을 부르는 달구질소리가 전한다.

산업·교통

은평구는 도심지역과 다른 주택·학교·상가·시장 등이 분포되어 깨끗하고 조용한 주거지역으로서 도시주변의 성격을 띤다. 즉 1960년대 이전 근교농업지대의 성격을 띠었으며,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진행된 구획정리사업에 따라 대단위 주거공간으로 변하면서, 산업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즉 시장의 상권과 도심에서 옮겨온 제조업체가 늘어났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 수도권 정비계획법에 따라 제조업체가 늘어났으며, 지역 시장을 기반으로 한 소규모 상권이 형성되어 소규모 점포가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연신내 일대에 서울 서부지역의 최대의 패션·의류타운이 형성되었다. 나아가 은평뉴타운 지역 개발과 수색역 일대의 백화점 유치 등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일찍이 서부버스터미널이 자리하여 서울과 경기도 서북부지역을 잇은 교통망의 중심지가 되었다. 즉 주택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될 즈음인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도심과의 교통은 불광동의 박석고개를 거쳐 구의 중앙을 관통하는 통일로(統一路) 하나에 의존하다시피 했다. 이후 신사동과 세검정을 잇는 진흥로가 개통되어 구기터널을 통하여 도심의 종로 방향으로 직통하였고, 불광천을 따라 증산로가 개설되어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방향으로 강변북로로 이어져 인천공항과 강남 지역으로 곧바로 통하게 되었다. 또한 지하철 3호선이 연결되어 서울과 고양시 방향을 편리하고 신속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지하철 6호선의 순환 종점이 되어 도심으로의 교통이 원활하게 되었다.

은평구의 중심도로는 통일로이다. 서울과 평양을 잇는 1번 국도로 고려시대 이래 개성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간선도로였으며, 중국 사신의 사행로였다. 이 길을 따라 지하철 3호선이 지나 녹번역·불광역·연신내역·구파발역이 역세권을 형성하고 있다. 또 구를 동서로 지나는 진흥로는 구기터널로 종로구로 통하고 지하철 6호선과 연계되며, 역시 구의 관문역할을 하는 은평로와 만나게 된다. 그 외 구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주요간선도로로 연서로·서오릉로·응암로·갈현동길 등이 있다.

지하철 3호선이 통일로를 따라 녹번역에서 구파발역 사이를 남북으로 관통하며, 지하철 6호선의 종점으로 응암-역촌-불광-독바위-연신내-구산-응암역으로 순환하여 운행되고 있다. 따라서 서울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이어지는 육상교통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관광

은평구의 관광자원은 삼각산 족두리봉(수리봉)·향로봉에서 향림담계곡으로 이어지는 경관과, 비봉에서 진관사계곡으로 이어지는 경관, 문수봉에서 의상봉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는 북한산성과 삼천사계곡으로 이어지는 전망이 제일이다. 삼각산의 수려한 경관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골짜기, 크고 작은 사찰과 폐사지 등은 우리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하나로 압축해놓은 명승을 자아내고 있다. 한편 은평구는 쾌적하고 살기 좋은 전원도시로 향토의 얼이 살아 숨쉬는 문화의 마을이며, 밝고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는 고장이다. 특히 연신내 로데오는 강북 최고의 패션상권이며, 주변에는 풍부한 먹거리와 낭만의 카페가 있는 젊음의 거리이다.

연신내 로데오거리는 서울 서북부 지역의 최대 상권으로 부상하고 있는 의류상설할인마당이다. 1997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이곳은 현재 약 50여 개의 의류매장이 자리하고 있으며, 먹자골목이 이어져 있다. 따라서 젊은이들의 공간으로 자리잡은 쇼핑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있다. 또 응암4동 대림시장 골목에는 우리나라 감자탕의 원조격인 감자국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1980년부터 시작된 감자탕골목의 역사는 한때 20여 개 업소가 넘기도 하였으며, 24시간 영업으로 서울 각지에서 손님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역촌동 오거리 부근은 술청거리로 불리었다. 옛날 술국이 유명했던 음식점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아마 불광동에 우시장, 대조동에 도살장이 있어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있었던 데서 유래된 듯하다. 지금은 우시장·도살장도 사라지고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지역문화축제행사로 통일로파발제, 매바위축제, 연천마을 호국기원제 등이 있다. 통일로파발제는 매년 10월 1일 구민의 날에 개최되는데, 취타대연주·파발문선포·파발마길놀이·퍼레이드(구파발인공폭포-통일로-구청광장), 파발제 재연 등이 행해진다. 매바위축제는 백련산 정상 은평정 일대에서 주민의 건강을 위한 매바위 제례와 더불어 매바위 풍물패에 의한 거리축제가 행해진다. 연천마을 호국기원제는 불광사 앞 공터에서 밥할머니 기원제와 젯밥나누기 등을 하며 축제를 벌인다.

동(洞)
  1. 녹번동(碌磻洞)

구의 동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서대문구 홍은동, 서쪽은 역촌동·대조동, 남쪽은 응암동, 북쪽은 불광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녹반(綠礬)이 많이 나는 고개라는 뜻의 녹번고개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은방 지역이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녹번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어 녹번리로 불렸다. 1950년 녹번동으로 바뀌었고,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동은 통일로 좌우측에 있어 은평구의 관문 역할을 하며, 동의 우측 고지대는 급경사 암반지역으로 능선을 따라 아파트·빌라 등 주거지역이고, 좌측은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상가와 관공서·학교가 있다. 그리고 국립보건원·은평문화예술회관 등이 있다.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녹번고개는 예로부터 산골(한방에서 말하는 자연동)이 많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1866년(고종 3) 프랑스 군함이 두 번째로 침입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통진(通津) 문수산을 거쳐 서울로 침입할 때 양주 목사 임한이 이곳에 진을 치고 보름 동안 수비하였다.

  1. 불광동(佛光洞)

구의 중앙과 동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종로구 구기동, 서쪽은 대조동·갈현동, 남쪽은 녹번동, 북쪽은 진관외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불광사에서 유래되었다. 근처에 바위와 크고 작은 사찰이 많아 부처의 서광이 서려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은방 지역이었다. 1914년 박석동·사정동·관동을 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불광리라 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50년에 불광동으로 바뀌었고,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은평구의 중심을 이루는 불광동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생긴 집단주택지역에 속하는데, 1957년 재건주택 171채로 시작되었으며, 1964년경 서울에서 문화·경제 수준이 높고 가장 안정된 동네로 알려졌다. 불광1동 지역은 삼각산 자락에 있어 자연경관이 좋고, 진흥로와 구기터널을 통해 종로구와 접해 있어 도심으로 집중하는 많은 교통량을 분산시키는 교통의 요지이다. 불광2동과 3동은 통일로와 연서로를 연결하는 일반 주거지역이고,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을 중심으로 상업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갈현동과 불광동을 양편에 끼고 구파발로 넘어가는 고개에 포장용 얇은 판돌을 깔아놓았다 하여 박석고개 또는 박석현(薄石峴)이라고 한다. 또 풍수지리상 지맥을 보호하기 위하여 돌을 깔아 놓았다고도 한다. 희빈장씨의 아버지 장형의 묘가 있었다는 관터굴(관동)이 있다.

  1. 갈현동(葛峴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박석고개를 사이에 두고 불광동, 남쪽은 구산동·대조동, 북쪽은 구파발동·진관외동, 서쪽은 봉산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이 일대에 칡이 많아서 칡고개·갈고개·가루게라 불렀던 것이 한자로 갈현이라 표현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으로 북부 연은방 갈고개계(葛古介契) 또는 갈현계 지역이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갈현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50년 갈현동으로 바뀌었고,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갈현1동은 통일로와 연신내 전철역 주변 및 갈현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었고, 갈현2동은 연서로·서오릉로·갈현동길에 접한 주거 및 상가지역으로 되어 있다. 서오릉으로 넘어가는 벌고개는 경릉 등 왕릉의 좌청룡에 해당되어 통행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말에 있는 수국사는 서오릉의 원찰로서 오늘날 황금사찰로 유명하다.

  1. 구산동(龜山洞)

구의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과 남쪽은 역촌동, 북쪽은 갈현동, 서쪽의 봉산을 경계로 경기도 고양시 향동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세가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고, 산에 거북 받침의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가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으로 북부 연은방 사계(私契) 지역이었다. 1914년 노지동을 합하여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산리라 하였고, 1949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50년 구산동으로 바뀌었고,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동 대부분이 주거지역으로 되어 있으며, 사회복지시설인 은평복지학교·천사원·시립갱생원이 있으며, 예일여자중·고등학교와 구산시장 등이 있다. 봉현봉수(蜂峴烽燧)가 구산동 뒤에 있는 산줄기의 봉현 서쪽에 있었다. 봉홧둑이라고도 하는데, 서쪽 고봉성산에서 오는 봉화를 받아 길마재 동쪽 봉수대로 전달하였다.

  1. 대조동(大棗洞)

구의 중앙에 있는 동이다.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동쪽은 불광동, 서쪽은 갈현동, 북쪽은 갈현동·불광동, 남쪽은 녹번동·역촌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이 마을에 대추나무가 많았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 북부 연은방 지역이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대조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50년 대조동으로 바뀌었고,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사방으로 통일로·연서로·진흥로·서오릉로 등 간선도로로 둘러싸여 있는 은평구 중심지역으로, 대조시장 등 상가가 밀집되어 있으며,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이 있어 유동인구가 많다.

조선시대 연서역은 경기 5도의 하나인 영서도(迎曙道) 찰방(察坊)이 있던 곳으로 영서역이던 것이 연서역으로 바뀌었다.

  1. 응암동(鷹巖洞)

구의 남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백련산을 경계로 서대문구 홍은동, 서쪽은 신사동·증산동, 남쪽은 서대문구 남가좌동, 북쪽의 역촌동·녹번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마을 뒤 백련산 기슭에 매가 앉은 모습의 바위가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또 왕의 일행이 궁중에서 나와 매사냥을 하던 큰 바위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 북부 연은방 지역이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응암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50년에 응암동으로 바뀌었고,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은평구의 간선도로가 모두 통과하여 서대문구를 지나 도심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다. 따라서 서부경찰서·은평등기소·은평우체국·서부세무서 등의 공공기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대림시장을 비롯한 응암오거리 상권이 발달해 있다.

  1. 역촌동(驛村洞)

구의 중앙 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응암동·녹번동,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향동동, 남쪽은 신사동·응암동, 북쪽은 대조동·구산동·갈현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대조동과 경계되는 지역에 조선시대부터 연서역(延曙驛)이 있어서 마방촌·역말·역촌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또 지형이 돌로 곶이를 이루었으므로 돌곶이, 한자명으로 석관동(石串洞)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 북부 연은방 역계(驛契) 지역이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역촌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50년에 역촌동으로 바뀌었고,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1. 신사동(新寺洞)

구의 남서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응암동, 남쪽은 증산동·수색동, 북쪽은 역촌동, 서쪽은 봉산 능선을 따라 경기도 고양시 향동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옛날 이 마을에 새 절[新寺]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 북부 연은방 지역이었다. 1914년에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에 속했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50년 신사동으로 바뀌었고,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동의 대부분 지역이 주거지역으로 되어 있으며, 은평터널길과 가좌로가 신사사거리에서 교차하며, 불광천을 따라 증산로가 지하철 6호선과 더불어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서울기독대학교, 숭실중·고등학교, 신사종합사회복지관, 신흥시장, 공동묘지 등이 있다.

  1. 증산동(繒山洞)

구의 남쪽 끝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응암동과 서대문구 북가좌동, 서쪽은 수색동, 남쪽은 서대문구 북가좌동·중동, 북쪽은신사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시루봉 아래에 있어 시루메라고 하였는데, 시루는 물이 새므로 좋지 않다 하여 시루 ‘증(甑)’ 자를 비단 ‘증(繒)’으로 바꾸어 붙인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 북부 연희방 지역이었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증산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50년 증산동으로 바뀌었고,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시루봉(반홍산) 기슭에 주거지·학교가 자리 잡고 있고, 불광천을 따라 증산로 위쪽으로 상가와 아파트·연립주택 등이 형성되어 있다. 지하철 6호선 증산역이 있고, 수색삼거리에 증산빗물펌프장이 있다. 증산종합시장과 서부농산물직판장이 있어 생필품 공급이 원활하다.

  1. 수색동(水色洞)

구의 남서쪽 끝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증산동,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향동동, 북쪽은 증산동·신사동, 남쪽은 마포구 상암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마을 앞 들판 건너편에 있는 물의 풍치가 좋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한강 하류로서 예로부터 물과 깊은 인연이 있어 수생리계(水生里契), 수색리계(水色里契), 수암리계(水岩里契), 학암리계(鶴岩里契)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 북부 연희방(延禧坊) 수생리계(水生里契), 수색리계(水色里契), 수암리계(水岩里契) 등으로 불린 지역이었다. 1914년에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수색리에 속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50년 수색동으로 바뀌었고,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수색동 고지대는 1961년 서울역 앞 양동·도동 지역 철거민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저소득층 밀집지역이다. 수색역 부근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의 환경이 열악하며, 재개발사업이 진행되어 주거환경이 개선되고 있다. 수색로와 은평터널길이 만나는 수색역 근처에 수색쇼핑센터·수일시장이 있고, 한국전력수색전력소·수색우체국 등이 밀집되어 있다.

  1. 구파발동(舊把撥洞)

구의 북서쪽 끝에 있는 동으로 동쪽은 진관외동, 서쪽은 고양시 동산동, 남쪽은 갈현동, 북쪽은 진관내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조선시대 서울에서 벽제관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공문서를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한 역참(驛站)으로서 우역(덕수원)의 일종인 파발이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고양군 신혈면 구파발리였다가, 1914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가 되었다. 1973년 7월 1일 진관내동·진관외동과 함께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서대문구 구파발동이 되었다.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진관내동에서 행정 관할하고 있다.

구파발동은 조선시대 덕수원 지역으로, 전형적인 서울 서북부의 외곽 지역이다. 서오릉의 주산인 효경산의 북쪽 기슭에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으며, 화훼단지가 분포되어 있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을 중심으로 통일로변에 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구파발삼거리에서 고양시 방면과 의정부 방면의 길이 만나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 되고 있으며, 지하철 3호선이 지나 유동인구가 많고 특히 공휴일이면 삼각산을 찾는 등산객의 만남의 장소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은평뉴타운지역 개발로 구파발 지역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1. 진관내동(津寬內洞)

구의 북쪽 끝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고양시 효자동, 서쪽은 고양시 동산동, 남쪽은 진관외동, 북쪽은 고양시 효자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진관사(津寬寺)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고양군 신혈면에 속하였고, 1914년 신도면 진관내리가 되었다. 1973년에는 서대문구에 편입되어 진관내동이 되었고,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고양시와 경계가 되는 창릉천(昌陵川)은 부근에 덕수원이 있어서 덕수천이라 하였는데, 하천의 하류에 서오릉의 하나인 창릉이 있어 근래에 이름이 바뀌었다. 동의 많은 면적이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최근 들어 은평뉴타운 개발지역이 되어 급속하게 경관이 변화되고 있다. 삼각산 서북쪽 기슭에 용암사·백화사·대원사·관음사 등 사찰이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북한산초등학교가 있다. 창릉천을 따라 구파발과 의정부를 잇는 북한산길이 있다.

  1. 진관외동(津寬外洞)

구의 북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고양시 북한동, 북쪽은 진관내동, 서쪽은 구파발동, 남쪽은 불광동과 접해 있다. 동명은 진관사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 고양군 신혈면에 속하였고, 1914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로 되었다. 1973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에 서대문구에서 은평구가 분구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되었다.

동의 많은 부분이 삼각산 응봉 기슭으로 북한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어, 넓은 지역이 개발제한구역 및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연서로 끝에서 이어지는 제각말길이 새롭게 넓혀지고, 이 길을 따라 진관사와 삼천사를 통한 북한산국립공원 행락객 등으로 유동인구와 교통량이 증가하고 있다. 통일로와 진관사길 주변으로 개발이 집중되었으며, 기자촌과 은평경찰서가 있다. 최근 들어 은평뉴타운 개발지역이 되어 급속하게 경관이 변화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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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서울특별시, 1990)
『서울의 전통문화』1·2(서울특별시문화재위원회, 1982·1986)
『서울의 가노명연혁』(서울특별시, 1985)
『서울육백년사』1~6(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2006)
『동명연혁고』3(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
『한국지명총람』1(한글학회, 1966)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월지유칠, 1917)
「서울특별시 구행정변천고」(나각순, 『향토서울』46, 1988)
은평구(www.eunpyeong.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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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나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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