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구 ()

중랑구청
중랑구청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서울특별시의 동북부에 위치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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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의 동북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은 경기도 구리시, 북쪽은 노원구 · 경기도 구리시, 남쪽은 성동구, 서쪽은 성북구 · 동대문구와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7°04'~127°07', 북위 37°34'~37°37'이다. 면적은 18.50㎢이고, 인구는 41만 3909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6개 행정동(6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신내동에 있다.

자연환경

동쪽은 불암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산(검암산, 178m) · 망우산(280m) · 용마봉(348m)의 산줄기가 발달해 있으며, 북쪽은 봉화산(138m) 일대의 구릉지가 있다. 이 산지에서 서남쪽으로 산기슭이 발달해 있고 중랑천과 만나게 되는 충적지로 이루어져 동고서저(東高西低)의 경동지괴(傾動地塊)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랑천 연변은 하천범람지토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륙평탄지토양은 하성충적층(河成沖積層)과 홍적층(洪積層)의 완경사로 되어있다.

동쪽에 한북정맥의 끝줄기인 불암산에서 아차산 줄기로 뻗은 산줄기가 흘러가면서 구릉산 · 망우산 · 용마봉 · 봉화산 등을 이루며, 서쪽으로는 묵동천 · 면목천이 계곡 사이를 흘러 중랑천에 합류되고, 다시 한강으로 유입된다. 그리고 면목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역은 상습 침수 지역이었으며, 대부분 복개되어 있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바탕으로 산과 한강의 영향을 받고 있는 도시기후도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2.3℃, 1월 평균기온은 -1.5℃, 8월 평균기온은 26·1℃, 연 강수량은 1,508.3㎜이다.

역사

중랑구 지역은 서울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구석기 유적이 있는 곳이다. 즉 면목동 구석기 유적은 한탄강의 전곡리 선사유적지와 금강의 공주 석장리 유적과 대비되는 후기 구석기 유적으로 서울 지역의 구석기 문화생활의 실체를 확인해 주고 있다. 그리고 상봉동과 봉화산 기슭에서는 청동기 유적이 확인되고 있어 중랑구 지역은 선사시대 이래 주민이 거주하며 생활을 영위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중랑구를 포함한 한강 유역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진국(辰國)과 삼한사회의 마한(馬韓), 그리고 초기 백제였다. 서기전 1세기 말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百濟)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한편 백제는 하남위례성에 도읍하기 전 하북위례성을 경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유력한 지역으로 중랑구 면목동, 광진구 중곡동 일대가 지적되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생산 활동과 인구 증가를 이루었고 보다 큰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475년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어갔다.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래 신라 삼국통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전국에 9주를 설치했고, 강남구를 포함한 서울 지방은 한산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서울 지방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면서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의 활동으로 태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중랑구의 산세를 이루는 봉화산 · 망우산 · 용마봉 등은 아차산의 지맥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지역은 삼국시대에 각축을 벌였던 곳으로 아차산성 및 아차산 제1∽5보루, 용마봉 제1∽7보루, 망우산 제1∽3보루, 봉화산 보루 등 고구려보루성을 살필 수 있다. 따라서 이곳은 삼국시대의 성곽 체제를 살필 수 있고, 정치적 통일을 위한 백제 · 고구려 · 신라의 각축 현장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940년(태조 23)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고 주군현(州郡縣)를 개칭함에 따라 한양군은 양주(楊州)로 편제되었다. 이때 중랑구 일대는 양주에 속하였으며, 문종과 숙종 때 남경이 설치됨에 따라 남경유수부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한양으로 천도함에 따라, 한양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양주군 고양주면 지역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는데, 중랑구 지역이 바로 그 일대에 해당되었다. 조선 초 양주군은 양주부, 양주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양주목이 되었다. 그리고 중랑구 일대는 양주 지역의 동남쪽 끝 지역에 해당되었으며 당시 망우리 · 고양주 등의 지명이 전한다. 현재의 중랑구는 양주군 망우리면 · 고양주면 일대에 해당되었다. 고양주면이나 망우리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영조 때 간행된 『여지도서』를 살펴보면, 망우리면의 인구는 233호에 남자 359명, 여자 529명으로 총 888명이었으며, 고양주면은 732호에 남자 1,754명, 여자 1,348명으로 총 3,148명으로 확인되어 대략적인 지역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중랑구 일대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 있는 검암산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중랑포나 송계원을 지난 임금 일행이 주정소 등을 두고 잠시 머물던 곳으로 능행소와 마방터 등의 관련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망우동의 양원마을에는 동래정씨의 집성촌이 있는데, 이는 고려 말 간의대부를 지낸 정구(鄭矩)가 이성계의 친구로서 조선왕조에 참여하지 않고 고려에 충절을 지킨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중랑구 일대는 광진구와 더불어 조선시대에 국립목장이 경영되었던 곳이다. 1663년(현종 4) 허목에 의해 쓰여진 「한성목장지도」 중 ‘진헌마색정도’에 보면 아차산 일대의 뚝섬과 중랑포를 경계로 하는 목장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순국한 신립 장군의 후손으로 인조반정 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신경진(申景禛)의 신도비와 평산 신씨 묘역이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지역적 특징을 살필 수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뜻에 따라 포천(抱川) · 양주(楊州) · 연천(漣川) 등지에서 의병이 모집되어 수차례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급기야 양주(楊州)에서 의병대장들의 모임을 열고 이인영(李麟榮)을 원수부 13도 의병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허위(許蔿)는 군사장(軍師長)이 되어 일거에 서울에 진입,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일본군과 대치,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퇴군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망우공원 서쪽 기슭에 13도창의군탑이 세워졌다. 그리고 중앙선(처음은 경경선)철도가 1936년 착공되어 1942년에 개통되면서 망우역이 설치되었다. 1911년 현재 중랑 지역은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면 묵동리 · 신현리 · 능후동 · 방축리 · 직곡리 · 상리 · 봉황동 · 내동리 · 능내동 · 양원리 · 입암리 · 봉현리 · 중리 · 하리와 고양군 두모면 면목리 지역이었으며, 1914년 양주군 구리면 상봉리 · 중하리 · 묵동리 · 망우리 · 신내리와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 지역이 되었다.

1949년 면목동 지역은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되었으며,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 때 경기도 구리면 상봉 · 중화 · 묵동 · 신내 · 망우리 등과 성동구 면목동이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망우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88년 망우출장소 관할지역이 중랑구로 분리, 신설되었다. 중랑구가 과수농업지역에서 서울로 편입되면서 점차 공장과 망우로를 중심으로 한 상권이 형성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부터 신택지개발로 인하여 새로운 주거단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재래시장 형태에서 백화점 · 쇼핑센터 · 마트 등 새로운 유통시설이 들어섰으며, 1985년 동마장버스터미널이 상봉시외버스터미널로 이전됨으로써 교통 · 서비스업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유물 · 유적

서울의 한강 유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일한 구석기 유적은 중랑구 면목동의 아차산 서쪽 사면 끝 기슭 면목고등학교 인근의 산기슭에서 발굴되었다. 1967년 경희대학교박물관팀은 면목지구 택지 건립을 위한 공사장, 약 30평 정도의 면적에 석기들이 흩어져 있었던 것을 발굴했다. 이 유적의 앞쪽으로 중랑천을 배경으로 한 넓은 들판이 펼쳐 있어 구석기인들이 일시적인 생활거주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은 후기 구석기 유적으로 서울지역 구석기 문화생활의 실체를 확인해 주었다. 발굴된 석기는 대부분 몸돌석기로 외날찍개 · 양날찍개 · 찌르개 · 긁개 · 망치돌 등이었고, 격지석기로 찌르개 · 옆날긁개 · 끝날긁개 등이 있었다. 하지만 정밀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택 건설 등의 도시개발이 진행되자 유적지가 모두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망우동과 면목동,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망우산 일대에는 서울시립장묘사업소 망우묘지가 있다. 1994년 7월 31일 현재 총면적 60만 847평에 약 3만 3353기의 분묘가 있다. 이곳이 공동묘지로 지정된 것은 1933년 5월 27일 경기도의 임야 일부를 경성부에서 양도받아 공동묘지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이다. 망우묘지는 광복 후에도 계속 사용하여 현재 서울시 안에 있는 유일한 공동묘지이다. 그러나 1973년 3월 25일 봉분이 가득 차서 기능이 중지되었다.

망우묘지공원에는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효시인 방정환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가이며 민족대표 33인에 해당되는 오세창 · 한용운 등이 안장되어 있다. 망우리묘소 입구에는 13도창의군탑이 세워져 있다. 1907년 일제의 한국군 강제 해산에 저항해 전국의 의병이 봉기하였다. 동년 11월 경기 양주에 13도의 의병이 모여 서울 진격작전을 벌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이 탑이다. 망우산 서쪽 기슭에는 평산 신씨(平山 申氏) 문중의 묘소 25기와 인조반정 일등공신인 신경진의 충익공 신경진 묘역이 있다. 충익공 신경진 묘역은 1995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신내동에는 봉수대로 이용되었던 봉화산정에 주위 65m, 높이 1m의 봉수지석단(烽燧址石壇)이 남아 있으며, 근래에 봉돈 1개가 복원되어 있다. 이 아차산봉수는 조선시대 서울로 이어지는 5로의 봉수 중 함경도 지역에서 오는 제1로의 제1횃불 길목에 속하며, 북쪽으로는 한이산 또는 대이산에서 연락을 받아, 서쪽으로 목멱산 봉수에 연락해 주는 역할을 하였던 중요한 봉수였다.

중랑구의 봉화산과 망우산에는 고구려보루로 알려진 유적이 있다. 봉화산 정상부에 평탄하게 조성된 지점의 하단부를 돌아가며 석축시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인근 아차산 보루군 등의 다른 고구려 유적과 매우 유사하고, 또한 유적 전역에서 고구려 토기가 발견되는 등 고구려 보루로 확인되고 있다. 아울러 망우산 제1·2·3보루가 확인되었는데,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중화동 가평 이씨 종중에 1998년 보물로 지정된 이윤손 유서(李允孫諭書)가 전해지고 있다. 이 유서는 1457년(세조 5)에 평안도 도절제사인 이윤손에게 친압(親押)의 제14밀부를 내리면서 발급한 명령서이다.

봉화산에는 도당굿과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산신각(山神閣)인 봉화제도당이 있다. 이곳에서 행해지는 봉화산 도당굿은 2005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으며, 보존회에서 운용하고 있다. 그리고 신내동에는 2002년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옹기장인 배요섭이 거주하고 있으며, 작업장은 남양주시 송천리에 있다.

교육 · 문화

중랑 지역은 서울에 편입되고 1970년대 도시화가 진행되어 인구가 증가하면서 교육기관들이 설립되기 시작하고 교육시설이 갖춰지기 시작하였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23개교, 중학교 14개교, 고등학교 10개교, 서일대학교와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가 있다. 그리고 망우동 금란공원에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활란의 묘역이 있는데, 이곳은 1969년에 기독교학교로 개교한 영란여자중 · 고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그리고 중랑구립정보도서관, 구립독서실과 공부방이 있어 사회교육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문화시설로는 공연장, 문화의집, 전시관, 영화관, 도서관 등을 비롯하여 지역문화예술의 증진을 위해 활동하는 중랑문화원과 중랑문화의 집, 중랑문화체육관이 있다. 구민회관에 대 · 소강당이 있어 종합공연장 역할을 한다. 또 영화관 겸 공연장으로 새서울극장, 면목극장, 중화소극장, 용마소극장, 태릉소극장이 있으며, 지역 언론기관으로 한국케이블TV 동부방송, 중랑유선방송, 서울중랑신문 등이 있다. 그리고 서희주무용아카데미 금슬무용단과 선소리산타령연구보존회가 활동하고 있다.

중랑구민체육센터, 중랑청소년수련관이 있으며, 중랑천 둔치에 설치된 중랑천체육공원에서는 생활체조가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리고 용마폭포공원 등 각종 근린공원과 자연공원에 산책로와 더불어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민속

세시풍속은 일정한 시기에 주기적 · 관습적으로 행해지는 연중행사인데, 주로 명절에 따라 행해진다. 정월에는 설날을 시작으로 『토정비결』을 보고, 제웅을 만들고, 용왕제를 지내며, 보름날에는 오곡밥을 먹었다. 그리고 4계절 24절기에 따라 행해지는 풍속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세시풍속과 관련한 민속놀이로 윷놀이, 돈치기놀이, 백중놀이, 거북놀이, 줄다리기, 쥐불놀이, 씨름 등이 있다.

민간에서 길흉화복이 이어지면서 현생의 부귀와 저승의 편안함을 기원하는 바램은 각종 굿거리로 남아 전하고 있다. 즉 재수굿, 병굿, 내림굿, 지노귀굿, 대수대명굿, 주당맞이굿, 살풀이굿, 노망굿 등이 있다. 봉화산에는 도당굿과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산신각(山神閣)인 봉화제도당이 있어 봉화산 도당굿이 행해지고 있다. 산신제는 소를 제물로 하여 신내동 · 중화동 · 상봉동 주민이 공동으로 올린다. 그리고 묵동에서는 별도로 도당굿과 산제를 지낸다.

설화 · 민요

구 이름이 된 ‘중랑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 중랑천 근방에 국립 숙소인 송계원(松溪院)이 있어서 중랑천을 송계라고 불렀다고 한다. 송계교를 석교로 개축할 때 16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 장님 중이가 부역에 동원되자 그 딸이 남장을 하고 대신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생리현상이 문제가 되어 대나무를 잘라서 옷 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 하고, 되도록 적게 수분을 섭취하는 등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함으로써 부역을 대신하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남자로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사실은 남장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녀를 중랑(仲娘)이라 불렀고 이후 중랑(中浪)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 경상도 장사가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 장사모임에 참가하고자 하였으나 늦게 와 상봉동에 이르렀을 때 몹시 갈증이 나 중랑천 물을 마시기 위해 엎드리자 바위에 손과 무릎자국이 패여 요물로 오인 받아 죽음에 이르고, 그 원한으로 마을 일대는 검은 가루(석탄)가 날리는 곳이 되었다는 ‘장사바위설화’가 전한다.

한편 중화동 성덕사 일대에는 원래 터가 세서 호열자와 질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전해지던 곳이었지만, 절이 들어선 뒤에는 절에서 치성을 들여 마을에 액이 떠다니거나 사람이 사고로 다치는 일도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먹골배전설’도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대항하여 단종복위운동을 꾀한 사육신은 처형당했고, 이후 단종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가게 되었다. 이때 호송을 책임졌던 금부도사 왕방연은 죄인에게는 물 한모금도 주지 말라는 어명을 받고 이를 따르면서도 단종의 처지를 안타까워했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후 서울로 돌아오자 관직을 그만두었다. 이후 왕방연은 봉화산 아래 중랑천 가에 거주지를 선정하여 살면서 날마다 필묵과 벗을 하며 배나무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는 단종을 호송하던 과정에서 어명을 지켜야 했던 자신을 속죄하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망우동 359번지 일대는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방면에서 서울로 오는 길목 역할을 하던 곳으로 망우리 고개를 기점으로 길손이 쉬어 가는 주막거리였다. 주막거리 부근에는 세 살 때 돌절구를 번쩍 들고 다섯 살에 아름드리 서낭목을 뽑아 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인 신(申)씨가 살았는데, 왕의 행차 때 호위를 담당하게 되어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는 설화가 전한다.

옛날에 한 나무꾼이 구릉산에서 숱하게 많은 나무를 하면서도 한 번도 산신께 제사를 드린 적이 없어서 산신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고개를 넘을 때 귀신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우레와 같은 짐승들의 소리가 박수소리 같이 들려 귀신이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일부러 여럿이 박수를 치며 넘었고, 서낭당에 제사를 지냈다는 ‘박수고개설화’가 전한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가 망우산 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건원릉 터를 바라보고 “이제 오랫동안의 근심을 잊게 되었다.”고 말하며, 먼저 이곳에 묘 터를 잡아놓은 남재(南在)에게 불망기를 써주었다는 ‘망우리고개 설화’가 유명하다.

산업 · 교통

중랑구가 서울에 편입된 당시에는 중랑천 동쪽에 일부 평야지대가 있을 뿐 대부분이 산지형으로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다. 특히 배나무 과수단지를 중심으로 배추 · 무 등 야채밭을 이루고 있었다. 1937년 중앙선이 개통되어 망우역이 만들어져 강원도 지역의 석탄과 목재가 서울로 반입되는 중간기착지로 이용되면서 물산의 집산지가 되었다. 그리고 망우리고개를 비롯한 간선도로의 확장으로 서울 동부의 구리 방향으로 직통로가 개설되면서 물류의 통로가 크게 열렸다. 1959년에 한독약품공장이 상봉동에 자리하게 됨에 따라 중랑구가 산업지구로 알려지게 되었고, 1962년 강원산업의 삼표연탄공장이 완성되면서 지역산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70년대 초 토지구획정리사업 시행으로 농경지가 주택지로 변모해 대부분이 거주지역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농경은 볼 수 없는 반면 노동력이 풍부해 잡화 · 일용품 · 의류업이 활발하다. 그리고 삼표산업 · 한독약품 · 삼성신약 · 크라운제과 · 동일섬유 등을 비롯한 각종 제조업체가 입지하고 있으며, 남양주시 등지에서 생산된 우유를 가공하는 유제품 가공공장과 연탄 제조공장, 묘비 · 석탑을 만드는 석재 가공공장 등이 발달해 있다. 한편 1990년대부터 신택지개발에 따라 재래시장의 형태에서 백화점 쇼핑센터로 변화된 유통시설이 들어섰다.

남북으로 걸쳐 있는 저산성 구릉이 교통로를 차단하기도 하나, 망우리고개를 넘어 영동 지역으로 나아가는 교통요지의 구실을 하였다. 아울러 구의 중앙을 동서로 통하는 망우로를 중심으로 도로가 바둑판식으로 확장 정비되어 있으며, 특히 동일로와 이어진 동이로는 종래 어린이대공원에서 면목동에 이르는 사이의 교통체증을 해소하고,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나갈 수 있어 도심 소통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 상봉시외버스터미널은 경기도 동북부와 강원도 일대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이며, 중앙선이 구의 북부를 동서로 지나며 망우역이 있다. 그리고 시내 중심부와 춘천 방면을 잇는 도로와 동부고속화도로 등이 건설되어 강남지역과도 교통이 원활해졌다. 지하철 7호선이 남북으로 관통하여 대중교통수단도 잘 발달되어 있다.

주요 간선도로로는 청량리로터리∼중랑교∼망우리시계로 이어지는 망우로(忘憂路)가 있으며, 중랑천과 평행하여 동일로와 그 연장인 동이로가 건설되어, 광진구 화양동에서 상봉동으로 직통하게 됨에 따라 면목 · 중곡 · 화양동 등 동부지역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또 구의 동서로 망우로 · 봉화산길 · 겸재길 · 봉우재길 · 사가정길, 남북으로 면목동길 · 상봉동길 · 용마산길 · 능산길 · 신내길 등이 바둑판처럼 정비되고,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주택가에 소방도로가 잘 발달되어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다.

중랑구의 중앙에 중앙선이 동서로 지나면서 망우역이 건설되어 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이 망우역으부터 춘천역을 향하는 경춘선이 중랑구를 통과한다. 그리고 지하철 7호선이 구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지하철 7호선은 상계동 등 고밀도 주거지역에서 강남을 거쳐 광명시까지 잇는 노선인데, 1단계 강북구간 16㎞는 1990년 12월 28일 착공하여 1996년 10월 11일 개통되었고, 2단계 강남구간 26㎞는 2000년 8월 1일에 개통되었다.

관광

중랑구의 관광자원은 구릉산(검암산) · 망우산 · 용마봉 · 봉화산의 산줄기에서 바라보는 사방의 산세와 서쪽의 중랑천, 동 · 남쪽의 한강을 바라보는 풍광이 제일이다. 아울러 그 일대에 펼쳐진 문화유적인 고구려보루와 봉수대 및 망우공원의 선열들 묘역, 충익공 신경진 묘역과 평산 신씨의 묘소 또한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이다. 특히 용마봉은 해발고도 348m로 아차산의 최고봉이다. 면목동 동편에 위치하는데, 망우공원과 중곡동 간의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망우동에서 아차산성을 거쳐 어린이대공원 후문 근처까지 이어진다. 아울러 그 서쪽 기슭 용마폭포공원에 있는 용마폭포는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용마폭포는 중앙에 폭 3∼10m, 높이 51.4m의 2단으로 이뤄진 용마폭포와 오른쪽에 21m의 청룡폭포, 왼쪽에 21.4m의 백마폭포 등 세 갈래 폭포줄기로 구분된다. 그 일대에는 축구장을 비롯한 각종 체육시설과 대형 연못 등이 설치되어 구민을 위한 각종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편의시설이 갖추어진 명소로 손꼽힌다. 그리고 상봉뉴스타관광호텔을 비롯한 5개 관광업소가 있다. 또 관광코스로 능행길코스, 아차산코스, 중랑천변코스가 개발되어 있다.

중랑구는 도시화가 급속히 전개되었고, 전통적인 농촌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민속시장이나 전통 먹거리촌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새로운 상권형성과 관련하여 상봉동시외버스터미널 일대에 유흥음식업소와 음식점이 밀집되면서 많은 주민들의 외식문화를 선도하고 있으며, 대단위 아파트 단지 입구에 형성된 상가 인근에 먹거리촌이 형성되어 있다.

중랑구의 지역문화예술행사는 전래 산신제 재현 및 보존을 위한 봉화산도당제, 사진공모전, 우수영화 감상회, 서예가훈쓰기, 어린이뮤지컬, 노래자랑, 가을음악회, 청소년 연극제, 구민한마당축제, 국악한마당, 여성합창단정기공연회, 청소년장기자랑, 문화학교작품발표회, 토요마당 한마당, 사이버 신춘문예, 시네마와 뮤직페스티벌, 해설있는 금요음악회 등이 있다. 그리고 서일대학에 연극영화과와 문예창작과가 있어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하고 있다.

동(洞)
  1. 면목동(面牧洞)

중랑구의 남쪽 일대에 있는 동이다. 동의 서쪽에는 중랑천 건너 동대문구 휘경동 · 장안동, 남쪽에는 아차산을 경계로 구리시 아천동, 동쪽에는 용마산을 경계로 구리시 교문동, 북쪽은 상봉동 · 망우동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국립 목마장(牧馬場)이 앞쪽에 있어 동명이 유래되었다. 양주군 고양주면,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였다가, 1949년 서울특별시 성동구 면목동이 되었다. 1963년 동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88년 중랑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아차산 아래에서 한강과 중랑천이 합치는 지점까지 완만한 구릉 형태로 이어졌기 때문에 천연목장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면목동 중랑천 일대에 공용 숙소인 송계원(松溪院)이 있어 이곳을 송계(松溪) 또는 속계(涑溪)라고 불렀다. 면목고등학교 인근의 택지조성 때 구석기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다. 서일대학이 있고, 용마자연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1. 상봉동(上鳳洞)

중랑구의 중앙에 있는 동이다. 동의 동쪽은 망우동, 서쪽은 중화동, 남쪽은 면목동, 북쪽은 봉화산을 경계로 신내동과 접해 있다. 이 마을의 옛 지명인 상리(上里)와 봉황리(鳳凰里)의 첫 글자를 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양주군 망우리면, 양주군 구리면(九里面) 상봉리(上鳳里)가 되었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로 편입되어 상봉동이 되었고, 1988년에 중랑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서울 동부지역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동부중앙시장과 상봉시장 등이 있어 중랑구 상권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망우로의 확장과 상봉터미널이 서울 북부지역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되면서 가전종합백화점 · 대형마트 등이 들어서 중심상권을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중앙선 망우역이 있어 물류유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특히 망우역을 이용한 무연탄 운송으로 연탄공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봉화산 기슭에서 일제강점기에 청동기시대의 토기와 석기가 발굴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 중화동(中和洞)

중랑구의 중앙 서쪽에 있는 동이다. 서쪽은 중랑천을 건너 동대문구 이문동 · 휘경동, 동쪽의 상봉동, 남쪽은 면목동, 북쪽은 묵동과 접해 있다. 자연마을인 가운뎃마을과 아랫마을을 합하여 동명을 한자로 표기하여 중하리(中下里)라 하였던 것이 주민의 건의에 따라 중화리(中和里)로 개칭되었다. 양주군 남면(南面) 길완리(吉完里) 지역이었으며, 구리면(九里面) 중하리가 되었다가, 1963년 동대문구에 편입되면서 중화동이 되었고, 1988년 중랑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마을의 동북쪽에 봉화산이 있으며, 도시계획에 의해 가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다. 도시화되기 이전에는 중랑천변의 배추와 미나리 산지였다. 동부간선도로 · 동일로와 더불어 지하철 7호선이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중랑구의 가장 오래된 종교시설로 1904년에 설립된 경동제일교회가 있으며, 초 · 중 · 고교의 교육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서촌(徐村) · 최촌(崔村) 등으로 불리는 집성촌이 남아있다.

  1. 묵동(墨洞)

중랑구의 서북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신내동, 서쪽은 성북구 석관동, 남쪽은 중화동, 북쪽의 도봉구 공릉동과 접해 있다.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을 이곳에서 제조하여 먹골이라 부르던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양주군 망우리면(忘憂里面) 묵동리(墨洞里), 구리면(九里面) 묵동리였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편입되면서 묵동이 되었고, 1988년 중랑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서쪽에 중랑천, 북쪽에 묵동천이 있고, 남동쪽에 봉화산이 있어 낮은 구릉산 아래 하천변에 발달된 마을이다. 봉화산에서 자라는 소나무로 참숯을 만들어 먹을 제조했는데 품질이 좋아 궁중에 진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먹골배 또는 묵골배라 불리던 배의 주산지로도 유명하였는데, 도시화가 되면서 배밭은 거의 사라졌다. 우이천과 묵동천이 합류되는 지점의 중랑천은 강폭이 넓어 중랑포라 하여 뱃길이 있었다. 동일로 아래로 지하철 7호선이 지나며 중랑경찰서가 있다.

  1. 망우동(忘憂洞)

중랑구의 중앙 동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망우산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서쪽은 상봉동, 남쪽은 면목동, 북서쪽은 신내동과 접해 있다.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가 되는 망우고개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양주군 망우리면,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였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편입되면서 망우동이 되었고, 1988년 중랑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망우동의 많은 부분이 공원묘지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방정환(方定煥) · 오세창(吳世昌) · 한용운(韓龍雲) · 조봉암(曺奉岩) · 문일평(文一平) · 지석영(池錫永) 등의 묘역이 있다.

  1. 신내동(新內洞)

중랑구의 북동쪽에 있는 동이다. 동쪽은 구릉산(검암산) 능선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 서쪽의 봉화산 능선을 따라 상봉동 · 묵동, 남쪽은 망우동, 북쪽의 도봉구 공릉동과 접해 있다. 이곳에 있던 마을 가운데 새고개마을인 신현(新峴)과 안마을인 내곡(內谷)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양주군 망우리면, 양주군 구리면 신내리(新內里)였다가, 1963년 동대문구에 편입되면서 신내동이 되었다가. 1988년부터 중랑구 신설로 이에 속하게 되었다.

경주 임씨(慶州 林氏)의 집성촌인 능말을 지나 동구릉으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 검암산이라 부르던 것이 구릉산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구릉산에서 오석(烏石) · 옥수석기(玉髓石器) · 흑도 등 석기시대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봉화산(烽火山)이 마을의 1/3을 차지하는데, 함경도에서 이어지는 조선시대 봉수대가 중건되어 있다. 그리고 봉화산 정상에는 도당굿과 산신제를 지내는 봉화제도당이 있으며, 1년에 한 번씩 대동굿이 행해지고 있다. 또 독점이 있어 1980년대까지 이곳에서 생산된 항아리가 서울시내에 상당량 유통되었다. 신내길이 북부간선도로와 이어져 교통이 편리해졌으며, 봉화산 동쪽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중랑구청과 구의회 건물이 들어서 새로운 주택지로 각광받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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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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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지표조사종합보고서』1∼3(서울역사박물관, 2005)
『서울의 문화재』(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3)
『서울 옛지명 되찾기 사업 자료집』(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3)
『서울교통사』(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1)
『한국의 향토문화자원』(전국문화원연합회, 2001)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서울의 하천』(이상배,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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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정사』(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97)
『중랑구지』(중랑구청, 1995)
『서울문화』(서울특별시, 1990)
『근교 큰산 활용방안연구』(서울특별시, 1989)
『서울의 가노명연혁』(서울특별시, 1985)
『동명연혁고』7(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2)
『서울육백년사』1∼6(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2006)
『한국지명총람』1(한글학회, 1966)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월지유칠, 1917)
중랑구(jungnang.seou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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