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은 조선 선조 때 평해군 북쪽 10리 월송변에 사천(沙川)이 바닷물과 서로 통해 사시사철 물이 넘쳐 백성들의 일상 생활과 상인들의 통행이 어려우무로, 당시 평해군수 조인징(趙仁徵)이 구산리에 북천교를 세우면서 그 경과를 기록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읍지에 의하면, 이 비를 건립한 조인징은 1599년(선조 32) 2월에 도임하여 1603년(선조 36) 3월 청원부사로 이배(移拜)되었다고 하므로, 이 비는 그가 평해를 떠나기 직전에 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발견 당시 세 부분으로 깨져 분리되었던 것을 다시 붙여 세웠다. 비의 전면에는 평해군 북쪽 10리 월송변에 사천(沙川)이 바닷물과 서로 통해 사시(四時)로 물어 넘쳐 민(民)들의 일상생활과 상인들의 통행이 어려워 당시 평해군수 조인징이 고을사람들과 의논하여 돌다리를 세움으로써 그간의 불편함을 해소하게 되었다는 건립경위, ‘만력 31년(1603, 선조 36) 3월 일’이라는 건립시기, 공대주(供大主) 김홍수(金洪水)와 석수(石手) 황종이(黃從伊), 그리고 응상(應上) 등 대시주(大施主) 71인의 원명과 추명을 새겨 넣었다. 배면에는 전면에 이어 황언정(黃彦仃) 등 대시주 20인의 이름과 승려로 여겨지는 역오(亦悟) 등 3인의 공양주(供養主)와 태인(太仁) 등 2인의 별좌(別坐), 화주(化主) 홍신(洪信)의 이름 등을 새겨 넣었다. 글씨는 정연한 행서체이나 간혹 초서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오늘날 자전에서 찾을 수 없는 이체자(異體字)도 간혹 보인다.
이 비를 통해서 17세기 초 해당 지역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에 새겨진 대화주 91명의 인명을 당시의 발음대로 기록하고 있어 국어학의 연구 자료로서도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