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에 소재하며, 199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신도비는 김성일의 묘에서 약 50m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며, 묘방석은 묘소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이며, 묘방석은 묘의 바로 옆에 두어 묘의 주인공을 밝혀두는 표지석이다.
김성일은 본관이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로 그 아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1568년(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어 의병활동을 도와 많은 공적을 남겼다. 특히 관군과 의병을 화합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1593년 경상우도 순찰사(巡察使)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을 순회하면서 격려하던 중 진주성에서 병을 얻어 생을 마쳤다.
신도비는 1634년(인조 12)에 세운 것으로, 정경세(鄭經世)가 비문을 짓고, 이산뢰(李山賚)가 글씨를 썼다. 앞면에 새겨진 비의 명칭은 김상용(金尙容)의 글씨이다. 신도비명은 ‘贈吏曹參判鶴峰金先生神道碑銘(증이조참판학봉김선생신도비명)’이라 되어 있다. 묘방석은 1619년(광해군 11)에 건립된 것으로, 신도비보다 앞서 묘를 지키고 있던 것이며, ‘明朝鮮鶴峰金先生士純之墓(명조선학봉김선생사순지묘)’라 새겨져 있다.
신도비의 비신 크기는 높이 213㎝, 너비 108㎝, 두께 37㎝이며 묘방석의 규격은 높이 155㎝, 너비 175㎝, 폭 130㎝, 둘레 500㎝로 되어 있다. 신도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신과 이수를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세워놓았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무늬를 새겨 놓았다.
신도비는 건립된 시기로 보면 경상북도 내에서 다른 비석에 비해 오래되었고, 규모가 거대하다. 묘방석은 다른 묘소에서 보기 힘든 예로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종중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신도비와 묘방석의 주인공인 김성일은 유성룡과 더불어 퇴계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의 학통이 장흥효(張興孝) · 이현일(李玄逸) · 이재(李栽) · 이상정(李象靖) · 유치명(柳致明) · 김흥락(金興洛)으로 한말까지 이어지면서 영남학파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이들 금석자료의 가치와 그 역사적 의미는 더욱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