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 자료 ( )

출판
문헌
조선시대 문신 · 의병장 우배선의 군공 및 그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한 문서. 군공문서.
정의
조선시대 문신 · 의병장 우배선의 군공 및 그와 관련된 내용을 기록한 문서. 군공문서.
개설

우배선(禹拜善, 1569~162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구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된 의병장이다. 그의 군공과 관련된 자료는 4종 15점으로, 군공책 1점, 교첩(敎牒) 2점과 교지(敎旨) 10점, 간찰(簡札) 1점, 각택기(各宅記) 1점 등이다. 단양우씨 열락당 종중 소유로 2002년 1월 2일 보물로 지정되어,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월곡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

교첩 2점은 1592년 2월에 선무랑행군기시주부(宣務郞行軍器寺主簿)의 직에 올랐을 때, 같은 해 3월에 봉훈랑군기시판관(奉訓郞軍器寺判官)에 승서될 때 받은 것이며, 교지는 모두 10점으로 통훈대부군자감정겸합천군수(通訓大夫軍資監正兼陜川郡守)에 임명(1593년 3월),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임명(1595년 10월), 통정대부행금산군수(通政大夫行金山郡守)에 임명(1600년 12월), 통정대부행낙안군수(通政大夫行樂安郡守)에 임명(1603년 3월), 절충장군행충무위사용겸사복장(折衝將軍行忠武衛司勇兼司僕將)에 임명(1607년 2월),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임명(1607년 12월), 절충장군행충무위사용(折衝將軍行忠武衛司勇)에 임명(1607년 12월), 절충장군행경상좌도수군우후(折衝將軍行慶尙左道水軍虞侯)에 임명(1609년 4월), 우배선 장군의 아버지 우성덕(禹成德)을 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추증(1607년 2월), 우배선 장군의 어머니 장씨(蔣氏)를 정부인(貞夫人)에 추증(1607년 2월)하는 내용이다.

간찰(보물, 2002년 지정)은 임진왜란 때의 영남지역 의병장 정인홍이 1599년(선조 32) 3월 2일에 작성한 것으로, 자신의 자식을 잃은 노비에 대한 조치를 부탁하는 내용이다. 간찰의 재료는 저지(楮紙)이다. 이 간찰은 단양우씨 종중 문서로 본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 위치한 단양우씨 종가에 보관되고 있던 것이 18세기 화재로 인해 소실될 때 그 중 일부를 수습하여 1804년(순조 4) 우재악 등에 의해 첩장(帖裝)되었다.

군공책(보물, 2002년 지정)은 『창의유록』은 19세기 초에 책자로 만든 것으로 재료는 저지(楮紙)이다. 규격은 가로는 32㎝이고, 세로는 42㎝이며, 20장 38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군공책은 「성주화원의병군공책(星州花園義兵軍功冊)」이라는 제목의 고문서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의병장 우배선을 비롯하여 우배선과 함께 참여한 의병들 89명의 성명과 직역(職役)·군공(軍功) 및 전투시기와 전투지가 구체적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참여한 전투내용은 1592년 10월부터 1593년 5월까지의 의병활동만 수록되어 있는데, 경상도 성주와 대구, 현풍과 칠곡 사이의 화원현역(花園縣域)이 주 활동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그동안 경상도 지역에서 전개한 각종 전투에서 올린 전과는 군공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참급(斬級) 63명, 사살(射殺) 604명, 작살(斫殺) 110명 등 모두 777명의 적군을 목 베거나 살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우배선 장군 휘하 전투요원들은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되어 서로 전력을 다해 전투를 전개함으로써 이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교지(교첩)(보물, 2002년 지정)는 총 12점으로 교지 7점, 차정첩 2점, 시문 1점, 기타 1점으로, 현재 경기도 안양의 우국일이 소장하고 있다. 이 중 시문 1점은 「화원마을을 지나가다 월촌주인에게 시를 읊어주다[花園過路吟贈月村主人]」라는 제목의 오언절구이다. “서풍은 문득 비를 내리고/ 허허로이 고인의 마을을 지나네/ 목화꽃은 게다가 땅에 떨어지고/ 들국화는 들판에 차구나/ 구름조각은 문득 생겨나 섞이고/ 햇빛은 점차 흔적을 남기네/ 우공(禹公)은 전장에서 적을 평정하였건만/ 유적이 남아 있지 않음을 탄식하노라.”는 내용의 이 시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화원 우배선의 고향화원마을을 지나는 감상을 읊고 있는데, 지은이는 알 수 없다.

한편, 기타 1점은 경기도 안성 가사현(加士峴)에 사는 유립(柳立)의 노자(奴子) 및 성주(星州) 가천(加川) 고사음동(古士音洞)에 사는 노자 관련 자료인데, 완결된 문서가 아니므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각택기(보물, 2002년 지정)의 작성 시기는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영의정 재임시기 및 윤의(尹顗)의 사헌부 장령 재임시기인 1603년(선조 36)에서 1604년 사이이다. 표기방식은 ‘관직명, 성명 댁(宅), 거주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42명의 관원을 수록하고 있으나, 문서의 훼손으로 일부는 알 수 없다. 자료의 내용을 살펴보면, 삼정승과 육조,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순으로 관직의 위계별로 목록이 작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주요 관직자의 거주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의정 이덕형 댁 남대문 외, 좌의정 윤승훈(尹承薰) 댁 영례방동(寧禮房洞), 우의정 유영경(柳永慶) 댁 부○교(府○橋) 부근, 돈녕부사 이원익 댁 사도시(司䆃寺), 장례원정 이항복 댁 창동(倉洞), 예조판서 기자헌 댁 명례방(明禮房), 이조참판 허성(許筬) 댁 장○○, ○조참의 박이장(朴而章) 댁 사헌부, 병조판서 서○(徐○) 댁 저시전동(苧市前洞), 병조참판 윤돈(尹暾) 댁 회현방(會賢坊), 병조참의 윤유기(尹惟幾) 댁 향교동(香校洞), 병조참지 송준(宋駿) 댁 왜관동(倭館洞), 호조판서 성영(成泳) 댁 사헌부사(司憲府使), 호조참판 정광적(鄭光積) 댁 서소문 외, 호조참의 서인원(徐仁元) 댁 왜관동, 예조판서 노직(盧稷) 댁 왜관동, 예조참판 박승종(朴承宗) 댁 주자동(注字洞), 예조참의 이철(李鐵) 댁 서소문 외, 공조판서 황진(黃璡) 댁 장의동(壯義洞), 공조참판 이희득(李希得) 댁 장흥고동(長興庫洞), 공조참의 ○윤선(○允先) 댁 왜관동, 형조판서 윤승길(尹承吉) 댁 왜관동, 형조찬판 홍가신(洪可臣) 댁 ○○전(○○前), 형조참의 이광준(李光俊) 댁 모○교(毛○橋)이다. 사헌부의 경우 대사헌 홍여순(洪汝諄) 댁은 수구문교(水口門橋), 집의(執義) 이덕형(李德泂) 댁은 서소문 안, 기타 5명의 관원 거주지를 수록하였다. 사간원은 대사간 성이문(成以文) 댁 향교동, 사간 윤수민(尹壽民) 댁 혜민서(惠民署) 근처, 정언 이신원(李信元, 본명 이춘원(李春元)) 댁 중추(中樞) 내, 정언 정개(鄭豈) 댁 전옥(典獄) 근처, 헌납 문려(文勵) 댁 종묘 근처이다. 승정원은 도승지 이상의(李尙毅) 댁은 호조 근처, 이외에 5명의 승지의 거주지를 수록하였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며, 특히 「군공책」은 전국적으로 유일한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전공 보고서로서, 대구지방의 의병활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한국인물대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
집필자
김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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