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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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개념
땅의 모양을 둥근 공 모양으로 보는 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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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땅의 모양을 둥근 공 모양으로 보는 학설.
개설

땅을 둥근 공 모양으로 보는 학설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천문학자에 의해 확립되었고, 이후 서양의 자연철학과 천문학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이 학설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 소개된 것은 16세기 서양 예수회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내용
  1. 서양의 지구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은 『티마이오스(Timaios)』에서 둥근 공 모양의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그 바깥을 천구가 두르고 있는 동심구의 우주 모델을 제안했다. 그의 동료이자 제자였던 에우독소스(Eudoxos)는 동심구 모델을 체계적인 천문학 이론으로 발전시켰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만물이 물, 불, 흙,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4원소 이론을 통해 땅이 둥근 이유를 철학적으로 설명했다.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는 해 그림자의 길이를 이용해 지구 둘레의 크기를 현대 값과 근사하게 계산해 내었다. 기원후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K. Ptolemios)는 지구를 평면에 투사하는 기하학적 투영법을 이용하여 지도를 제작하였고, 그의 방법이 16세기 유럽 지도학자들에 의해 개선되어 오늘날까지 여러 지도제작법으로 사용·개발되었다.

  1. 지구설의 동아시아 전래

서양과는 달리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땅이 대체로 평평한 모양이며, 사람 사는 세상이 그 ‘위’에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 중국이 위치해 있다고 생각했다. 16세기 말 명나라가 다스리던 중국에 기독교 선교를 위해 진입한 예수회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중국에 처음으로 땅이 둥근 공 모양이라는 서양의 학설을 소개했다.

1602년(선조 35)북경에서 간행한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1602)에서 그는 “땅과 바다는 본래 둥근 모양으로 천구의 가운데 위치하며, 땅의 상하사방에 모두 사람이 거주한다”고 선언했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위도에 따라 북극고도가 일정하게 바뀌며, 땅의 동서로 시차가 있다는 등의 여러 증거를 들어 땅이 둥근 모양임을 보여주려 했다. 그들은 특히 둥근 땅 위에는 중심이 없으며, 중국도 세계의 지리적 중심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리치가 소개한 지구설은 동아시아인의 상식적 세계관과 충돌했으므로, 중국과 조선 사회에서 그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많은 지식인들이 지구설을 받아들였다. 그 중요한 원인은 1645년(효종 5)부터 중국 조정의 공식 천문학으로 채택된 서양의 천문학이 지구설을 관측과 계산의 기본 모델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도 1654년(효종 5)부터 서양 천문학을 받아들였으며, 그와 함께 양반 지식인 중에서 지구설을 받아들인 사람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770년(영조 46)에 편찬된 일종의 백과사전류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는 지구설을 공식 천문학 모델로 인정했다.

참고문헌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서양과학의 기원들』(데이비드 C. 린드버그, 이종흡 역, 나남, 2009)
「조선후기 지구·지전 논의와 유학전통」(임종태, 『한국유학사상대계-과학기술사상편』, 한국국학진흥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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