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8㎝에 이르는 크기와 넓은 어깨의 당당한 양감이 잘 어울리는 항아리이다. 항아리 바닥의 안쪽에 굽을 만들어 다리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 점이 위쪽에 비해 아래쪽이 좁은 항아리의 형태에 안정감을 갖게 한다. 이와 함께 항아리의 표면 전체를 다섯 개의 면(面)으로 분할하여 네 가지의 기법으로 장식하였다. 즉 구연과 목은 귀얄분장으로, 두 부분으로 구분된 어깨의 윗단에는 식물의 줄기를 모아 만든 풀비인 귀얄로 백토분장을 한 다음 문양의 윤곽선을 긁어낸 방식인 박지기법의 연판문(蓮瓣文)을, 아랫단에는 휘돌아 뻗어나간 당초문(唐草文)을 선상감기법(線象嵌技法)으로 표현하였다. 항아리의 몸통에는 양쪽에 무성한 잎이 있는 좌우 대칭형의 활짝 핀 모란 세 송이를 면상감기법(面象嵌技法)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화려한 장식과는 대조적으로 항아리의 몸통 아랫부분은 문양 없이 속도감이 느껴지는 귀얄자국만 남겨두어 몸통에 표현된 모란꽃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내었다. 완형의 항아리이며, 바닥면을 제외한 전면에 투명한 유약을 얇게 입혔다. 항아리 표면 일부에 유약을 입히는 과정에서 유약이 두껍게 흘러내려 뭉친 자국이 있다.
분청사기의 여러 가지 장식기법은 제작시기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개성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즉 15세기 전반에 면상감기법으로 표현된 모란꽃이 후반에는 제작지역에 따라 충청도에서는 철화기법(鐵畵技法)으로, 전라도에서는 조화(彫花)와 박지기법(剝地技法)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다양성은 분청사기를 제작한 장인집단(匠人集團)의 개성이 표출된 것이다.
15세기에 만들어진 분청사기·백자·청자 중에서 제작지의 범위와 생산량에 비추어 볼 때 조선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자기는 분청사기이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세종 연간인 15세기 전반에 현물 세금인 공물(貢物)로서 인화문(印花文) 위주의 통일된 양식으로 전국에서 제작되었다. 이처럼 여러 지역에서 동일한 형태 및 문양으로 제작된 공납용(貢納用) 분청사기와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으면서도, 이 분청사기상감모란문항아리는 여러 가지 장식기법으로 개성이 강한 문양을 표현하여 분청사기의 특징인 다양성을 잘 담아낸 예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