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장군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토기(土器)로 제작되어 그 연원이 오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분청사기와 백자로 제작되었으며, 특히 15세기의 분청사기 장군은 다양한 형태와 문양으로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장군의 한자표기는 ‘장본(獐本)’으로 그 명칭과 형태가 『세종실록(世宗實錄)』27권 7년 2월 15일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장본은 술그릇이다. 형상이 도고(鼗鼓)와 같고, 배에 주둥이가 있는 것을 속칭 장본이라 한다(獐本, 酒器, 形如鼗皷, 腹有口, 俗號獐本)’고 하여 용도와 형태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분청사기장군의 일반적인 형태는 가로로 긴 타원(長橢圓)의 원통형(圓筒形) 몸통에, 액체를 따를 수 있도록 따로 만들어 붙인 입(口緣)이 있다. 몸통의 형태는 드물게 사각(四角)인 것도 있다. 입지름(口徑)은 보통 3∼5㎝ 내외이며, 굽다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종류이다. 굽다리가 없는 형태의 장군은 측면인 양쪽 마구리 중 한쪽이 편평하거나 몸체의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 세워서도 사용할 수 있는 구조이다.
분청사기인화문장군의 몸통은 부풀어 오른 듯이 팽만한데 아래쪽이 편평하여 안정감이 있고, 위쪽 가운데에는 좁은 입이 붙어있다. 측면인 마구리의 한 쪽은 둥글어 배가 부른 모습이고, 유약을 닦아내고 가마 안에서 번조할 때 바닥면으로 사용한 편평한 다른 면에는 모래를 받친 흔적이 있다. 마구리의 편평한 면을 제외하고 몸통 전체에 작은 점(點) 모양의 문양을 빈틈없이 채웠다. 문양을 장식한 방법은 흙으로 만든 도장(印)을 이용하여 찍는 인화기법(印花技法)으로, 어두운 색상의 점은 태토(胎土)가 드러난 부분이고, 흰 바탕은 도장을 찍은 후 장군의 표면에 바른 분장토(粉粧土)의 색상이다. 장군의 전체 형태가 잘 남아 있고, 전면에 시유한 투명한 유약은 일부 두꺼운 부분이 푸른빛을 띠고 있다.
고려시대인 14세기 중엽 경 쇠퇴기에 접어든 상감청자에서 양식적으로 분화하여 조선시대인 15세기 초반에 분청사기다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특히 세종연간(世宗年間 1418∼1450년)에는 국가운영에 소용되는 다양한 수공업품의 품질을 국가차원에서 관리함으로써 여러 가지 현물(現物) 세금 중 한 가지였던 분청사기도 그 양식이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문양을 표현한 장식기법이다. 즉 한 개의 문양을 새긴 낱개의 도장을 사용한 단독인화기법(單獨印花技法)에서 한 개의 도장에 동일한 문양을 여러 개를 새긴 집단연권인화기법(集團連圈印花技法)으로의 변화이다. 그 결과 분청사기는 밀집도가 높은 치밀한 인화문으로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릇의 표면 색상은 전체적으로 흰빛을 띠게 되었다.
2004년 보물로 지정된 분청사기인화문장군은 이러한 분청사기의 시대적인 제작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몸통의 형태는 간결하고 자연스럽다. 속이 꽉 찬 ‘한 개의 덩어리’처럼 보이는 몸통은 넓은 면을 툭툭 쳐서 만든듯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원통형이 아니어서 오히려 질박한 느낌을 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면에 작은 점을 빼곡하게 채운 인화기법은 좁고 길쭉한 하나의 도장에 3∼5개의 점을 새겨서 찍은 ‘집단연권형(集團連圈形)’으로 빈틈이 없는 치밀함으로 공예의장적인 면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