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어는 일반적으로 화승(畵僧)에 대한 호칭으로 대개 불화의 화기(畵記: 불화의 하단에 해당불화의 제작연대·봉안장소·제작목적·시주자·제작자 명단 등을 적은 것)에서 이 용어를 볼 수 있다. 불화 화승에 대한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화원(畵員)·화사(畵師)·용면(龍眠)·편수(片手)·화공(畵工)·비수(毘首)·채화(彩畵)·회사(繪事)·금어(金魚)·경화(敬畵)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이 중 금어는 이들에 대한 존칭으로 파악된다. ‘금어’는 단독으로 명기(銘記)되기도 하였지만, ‘편수(片手)’나 ‘화원(畵員)’과 함께 기재되기도 하였다. 이때에는 금어가 선행하고 편수나 화원이 후행해 관례상 화승의 위계에 따른 순차적인 표기로 파악되며, 선행한 금어가 상급자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등 민족적 와해와 혼란을 겪었던 20세기 초반에 조성된 불화에서는 이와 역순위로 기재된 경우도 많다.
금어의 어원(語原)은 명확하지 않으며, 부처님께서 극락의 못에 금어가 없는 것을 보고 현세에 부처상을 묘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세에 극락의 금어로 환생시켜 주겠다고 한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금어를 화승의 호칭으로 사용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1495년에 제작한 윤필암(閏筆庵) 「석가모니불도」의 화기(畵記)에 불화를 그린 화승을 ‘금어’로 기재한 예가 가장 빠르며, 갑사(甲寺) 「괘불」(1650년) 등 17세기에도 간혹 화승을 금어로 표기한 경우를 볼 수 있다. 이후 18세기에 활동했던 화승에 대해서는 보다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이후 보편화되었다.
18세기 유명한 화승이었던 의겸(義謙)이 수화사(首畵師)로 참여한 송광사 응진전 석가모니불도(松廣寺應眞殿釋迦牟尼佛圖)(1724년), 송광사 영산전 석가모니불도(松廣寺靈山殿釋迦牟尼佛圖)(1725년), 운흥사 괘불(雲興寺掛佛)(1730년)과 긍척(亘陟)이 수화사를 맡은 흥국사 팔상전 후불도(興國寺八相殿後佛圖) (1741년) 등 다수의 불화에서 그들을 금어로 기재하였다. 개암사(開巖寺) 괘불(1749년)에서는 의겸을 ‘금어존숙’(金魚尊宿: 존숙은 남의 본보기가 될만한 승려 또는 절의 주지를 말함)으로 적고 있어 그가 회화적 기량 뿐 아니라 수행승으로서도 매우 존경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화승에 대해 금어라는 호칭이 자주 사용되었으며, 19세기 이후에 와서는 가장 보편적인 화승의 칭호로 정착했다. 금어 이외에도 불화 화승에 대한 존칭으로는 용면(龍眠)·화사(畵師)·경화(敬畵)·불모(佛母)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