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불교 사찰에서 건축이나 목수(木手)일을 하는 사람, 혹은 단청이나 불화를 그리는 사람을 편수라고 불렀다. 불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일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사찰 안에서 해결하였기 때문에 의·식·주 등 기초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물론, 건물을 짓거나, 단청이나 불상을 만들고, 불화를 그리는 등 사찰을 장엄하는 일도 모두 자체 인력으로 해결하였다. 따라서 승려나 일반인 가운데 기술이 있는 자들이 절을 짓고 경전을 쓰고 불상을 조성하며 불화를 그리는 등의 일을 담당하였다.
편수의 역할은 불상의 복장(腹藏)이나 불화의 화기(畵記), 또는 사찰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불사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적힌 명단을 증명질(證明秩) 혹은 화원질(畵員秩)·비수질(毘首秩)이라 하는데, 이 명단 가운데 편수가 포함되어 있다. 이 편수라는 호칭은 조선 후기에 주로 사용되었는데, 18세기에는 간혹 쓰이다 19세기에 와서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편수는 세부적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던 듯한데, 운흥사(雲興寺) 괘불(1730년)의 화기를 보면 출초편수(出草片手)·금어편수(金魚片手)·야장편수(冶匠片手)·연장편수(鍊匠片手)·소목편수(銷木片手)와 같이 구분해 불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을 기재하였다. 이 업무를 총괄하는 편수를 도편수(都片手)라 했다. 다만 구체적으로 역할 분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불화가 선으로 그리고 채색하는 것 외에 배접, 아교포수(阿膠泡水), 표장(表裝) 등 완성하기까지 여러 가지 절차와 공정이 있는 만큼 이에 따른 분업이나 전문성이 구분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
특히 불화에서 편수는 금어(金魚)와 함께 기재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화기의 경우에 따라서 금어와 편수로 구분해 불화제작에 참여한 사람을 적은 경우가 있으며, 또 금어(金魚)·편수(片手)·편장(片章)으로 구분되는 경우도 있어 금어와 편수간의 역할이 분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흥사 석가모니불도(1749년)는 금어편수와 개금(改金)편수로, 화계사(華溪寺) 괘불(1886년)에서는 금어·출초(出草)·편수로 역할을 구분하였다. 이때는 대개 금어가 선행하고 편수가 후행하여 이 두 명칭에 해당하는 화승 사이에 상하 위계가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20세기 이후에는 오히려 역전되어 편수가 선행하고 금어가 후행하는 사례가 눈에 띄어 이 두 호칭에 해당하는 화승 사이에 어떤 관계 변화가 있었거나 위계가 와해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