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승들은 사찰에서 불화(佛畵)를 그리거나 일반회화 화가로 활동했다. 승려 출신의 화가로는 중국 송대(宋代)의 양해(梁楷)나 목계(牧谿), 청대(淸代)의 팔대산인(八大山人)이나 홍인(弘仁)이 그 대표적이다. 이들은 기행(奇行)과 더불어 개성이 강한 화풍을 선보이며 일반회화나 불화 혹은 선화(禪畵)를 그림으로써 중국회화사상 뚜렷한 행적을 남겼다. 우리나라에서의 화승은 불화를 그리는 승려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특히 조선시대의 불가(佛家)에는 불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승려들이 집단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들을 화승이라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는 승려가 처음부터 불화를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 기술되어 있듯이 황룡사(黃龍寺) 「노송도(老松圖)」로 유명한 솔거(率居)는 평민 출신이었으며, 1323년작 「수월관음도」를 그린 서구방(徐九方)이나 1310년작 「수월관음도」를 그린 김우문(金祐文) 등은 내반종사(內班從事: 고려시대 관직이름. 종9품에 해당)에 봉직하는 관료화가였다. 조선시대 들어와 「관경변상도」(1465년)를 그린 이맹근(李孟根)이나 「관음32응신도」(1550년)를 그린 이자실(李自實) 역시 나라에 봉직하는 관료 화가였다. 이렇듯 고려와 조선 전기까지는 주로 일반화가들이 불화 수요를 충족시켰다. 하지만 조선 후기부터 승려들이 불화 제작을 전담하기 시작했다. 승려들은 단체로 사찰을 옮겨 다니며 불화를 전문적으로 제작함으로써 화승이라는 직업군이 형성되었다. 우리나라의 화승에 대한 호칭은 매우 다양했다. 고려시대에는 근화(謹畵)·화수(畵手)·화(畵) 등으로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훨씬 다양해져 화원(畵員, 畵圓)·화사(畵師, 畵士)·금어(金魚)·용면(龍眠)·편수(片手)·화공(畵工)·비수(毘首)·채화(彩畵)·회사(繪事)·경화(敬畵) 등이 쓰였다. 이 용어들은 조선 전기와 후기에 따라 쓰이는 비중의 편차가 다른데, 조선 전기나 18세기 초반까지는 ‘화원’이나 ‘화사’ 로 빈번하게 기재되었으나, 18세기 중후반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금어’와 ‘편수’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많은 화승이 배출되면서 걸출한 화승들이 활약하였는데, 18세기에는 의겸(義謙)·세관(世冠)·임한(任閑) 등을 들 수 있다. 19세기에 오면 화승의 수효는 더 많아졌으며, 전라도·충청도·경상도·강원도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화승들이 자신의 주요 거처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화승에 대한 다양한 호칭은 ‘존칭’와 ‘일반칭’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가령 화사(畵師)·금어(金魚)·용면(龍眠)·경화(敬畵) 등은 화승에 대한 존칭의 의미로 쓴 것이며, 비수(毘首)·편수(片手)·양공(良工) 등은 특정 기술을 지닌 장인에 대한 일반 호칭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같은 구분은 불화의 화기(畵記) 기재방식을 통해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