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필화는 근래와 와서 부르는 이름이고, 본래 이름은 비백서(飛白書)라 했다. 비백서는 원래 비로 쓴 자국처럼 희끗희끗하게 붓자국이 드러난 글씨체를 가리킨다. 붓끝이 잘게 갈라지고 필세가 비동(飛動)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백은 중국 동한시대 유명한 학자이자 서예가인 채옹(蔡邕)이 창조했다고 한다. 한(漢)·위(魏)시대 궁전의 제액(題額)에 이 서체를 사용했고, 후한(後漢) 때에는 장지(張芝)가 일필서(一筆書)의 비백을 썼다. 위나라의 위탄(韋誕), 진(晉)나라의 위항(衛恒),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등도 모두 비백체의 명수였고, 당태종이나 송휘종도 비백서에 능했다고 한다. 그만큼 중국에서 비백서는 궁중을 비롯한 상류계층에서 즐기는 중요한 서체였으나, 원나라 이후에는 서예의 영역에서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비백서가 주로 민간에서 유행했다. 당시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비백서는 버드나무의 가지를 깎아 그 끝을 갈라지게 하고 먹을 찍어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등의 글자를 쓴 것이다. 점을 찍고, 선을 긋고, 파임하고, 삐치는 것을 마음대로 해서 물고기, 게, 새우, 제비 등의 모양을 만든다”라고 설명했다. 진(晉)나라 유소(劉劭)가 지은 「비백서세명(飛白書勢銘)」에서 그 형상이 “새, 물고기, 용, 뱀, 거북, 짐승, 신선과 같고, 모기 다리가 파도에 쓸리니 해서(楷書)․예서(隸書)․팔분(八分)과 같다”고 했다. 이에 근거하여 중국의 민간에서도 납작한 죽필로 글씨를 쓸 때, 점과 획의 꽃, 새, 짐승의 형상을 비백체로 바꾼다.
버드나무나 대나무로 쓰는 비백서는 근대에 와서 가죽이나 중절모의 재료처럼 두터운 천 조각에 여러 가지 색의 안료를 묻혀서 그림이나 문양과 함께 그린 혁필화로 발전했다.
혁필화는 원래 시골 장터에서 그려 팔았던 민화였는데, 지금은 인사동, 민속촌 등 관광객이 몰리는 곳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혁필화는 전통 민화 가운데 유일하게 길거리에서 제작, 판매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간직하고 있는 ‘길거리 민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