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황새바위’라는 지명은 이곳에 황새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는 것이 통설이지만, 일부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사학죄인’(邪學罪人)의 죄목으로 목에 ‘항쇄(項鎖)’라는 형구(形具)를 두르고 이곳에 끌려나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명칭이라고도 한다.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처형을 당할 때면 맞은 편 산 위에 흰옷을 입은 군중들이 마치 병풍을 친 모양으로 둘러서서 지켜보았다고 하며, 참수형을 당한 죄인들의 머리는 이곳 나무 위에 오랫동안 매달아 두어, 지나가는 군중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는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황새바위에서 최초로 순교한 천주교인은 충청도 내포(內浦) 일대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여 ‘내포의 사도’로 불리다가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으로 1801년 4월 9일 이곳에서 참수형(斬首刑)을 당했다. 그뒤 이종국, 문윤진, 이국승(李國昇, 바오로) 등이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1812년 공주에서 참수형에 처해진 것으로 기록에 나오는 장대원(마티아)과 황 바오로의 순교장소도 ‘황새바위’였을 가능성이 있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한 사람으로는 기록상 190 여명이 확인되는데, 이들 중에서 주로 감옥 등 은밀한 곳에서 비밀리에 집행되는 교수형(絞首刑)이나 백지사형(白紙死刑)을 제외하고, 참수형이나 장살형(杖殺刑) 등 공개적으로 실시되는 형벌에 처해진 이들 중 다수가 이곳 황새바위에서 순교했을 것이다.
1914년 6월 간행된『Im Lande der Morgenstille(朝鮮)』이라는 책자에서 웨버(N.Weber) 아빠스가 “공주의 형장에서 사형수의 무덤을 바라봄”이라는 제목의 삽화를 그려 황새바위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였다. 1937년 공주 중동본당의 최종철(崔宗哲, 마르코) 신부가 발간한 『공주 천주교회 연혁(公州天主敎會沿革)』에 이존창이 이곳에서 순교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1978년 중동본당 신자 지재희가 황새바위 순교지에 대한 구전을 듣고 지역 노인들에게 위치를 확인한 후, 당시 대전교구장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주교에게 보고하자, 대전교구가 부지 구입비용을 지원하여, 1980년 12월 중동본당 주임 김동억(金東億, 바오로) 신부가 황새바위 언덕부지 2,410평을 구입하여 성지(聖地) 조성의 기반을 마련했다. 1982년 교동본당 초대주임 조장윤(베르나르도) 신부가 지재희를 위원장으로 하는 ‘황새바위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성지개발에 나섰다. 1985년 기록상 전해오는 순교자 248명의 이름을 내부에 새긴 무덤경당과 순교탑 등을 완공하고 경갑룡(景甲龍, 요셉) 주교가 축복식을 집전하였으며, 이후에도 무덤경당 앞 광장에 12사도를 상징하는 돌기둥을 세우고 고통의 성모자상(聖母子像)을 안치하고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으며, 2002년 11월에는 대경당을 완공하였다. 2008년 12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황새바위 성지는 공주지방에서 참수형이나 장살형 등 군중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사형에 처해진 천주교 순교자와 관련된 순교성지(殉敎聖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