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시기 다양한 형태의 전선 원호사업이 전개되었는데, 농촌에서는 다수확경쟁운동,전선공동작업대운동과 전선원호미헌납사업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46년 봄 북한에서 토지개혁법령이 시행된 후, 동년 말 재령군 대흥리 김제원 농민은 분여받은 토지에서 생산된 쌀 30가마니를 소달구지에 싣고 평양에 가서 국가에 헌납하였다. 이에 김제원을 본받아 재령군 농민들은 농업현물세완납경축대회를 열고 애국미헌납운동과 양곡수매사업을 힘차게 전개할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당일 재령군 농민은 애국미 830가마니를 헌납하고 며칠 동안 수천 가마니를 애국미로 헌납했다. 이후 현재까지 ‘김제원의 뒤를 이어 우리도 다같이 진정한 조선의 농민이 되자’는 선전선동이 펼쳐졌고, 이를 계기로 ‘애국미 헌납운동’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전선 원호미 헌납은 1952년 11월 평원군에서 수확을 많이 한 농민들로부터 시작되었고, 북한에서는 이것이 온 나라에 퍼져 전군중적인 전선원호미헌납운동으로 발전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주의 한 농민은 벼 100가마니를 전선원호미로 헌납하였으며, 신천군의 한 여성농민은 80가마니의 양곡을 전선원호미로 제공했다. 평원군의 농민들이 쌀 1,800여 가마니를 헌납한 것을 비롯하여 평안남도의 농민들은 1953년 2월 말까지 근 6,400가마니의 전선 원호미를 헌납하였다. 1953년 4월말까지 각지에서 헌납된 전선원호미는 수 천톤에 달했다고 한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농촌에서 식량공출을 목적으로 김제원 영웅 따라 배우기와 전선원호미헌납운동으로 대중 선전선동을 하고 있다. 또한 고난의 행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원호미헌납운동 등을 통해 농민을 대상으로 선전활동을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