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화회

  • 예술·체육
  • 단체
  • 일제강점기
1919년 서울시내 고보에 다니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미술단체.
집필 및 수정
  • 집필 2012년
  • 권행가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19년 서울시내 고보에 다니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미술단체.

연원 및 변천

고려화회는 서양화 교육 및 전람회 개최를 위해 1919년 11월 1일 경성시내의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학생들 중 박영래(朴榮來)ㆍ강진구(姜振九)ㆍ김창섭(金昌燮)ㆍ안석주(安碩柱)ㆍ이제창(李濟昶)ㆍ장발(張勃) 등이 발기하여 조직된 학생미술단체이다. 창립 당시 화회 회원은 12여 명이었으며, 이후 구본웅(具本雄)ㆍ홍재유(洪在裕)ㆍ이재상(李在祥)이 들어왔다. 고문 및 선생으로 고희동(高羲東)ㆍ야마모토 바이가이(山本梅涯)ㆍ타카키 하이스이(高木背水)ㆍ마루노 유타카(丸野豊)가 참여했다.

11월 1일 고려화회를 개최한 이후 11월 21일부터 실기교육이 시작되었다. 장소는 종로 중앙청년회였으며, 매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수채화와 서양화 강습을 실시했는데, 야마모토 바이가이가 수채화를, 마루노 유카타가 유화교육을 담당했다. 고려화회가 경성시내의 고보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연유는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고희동이 여러 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하면서 만난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창립회원인 이제창, 안석주, 장발 등이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이 단체는 오래가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의의와 평가

비록 단명했지만 1910년대 조선인에 의해 조직된 최초의 서양화 교육단체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참고문헌

  • - 『한국근대미술의 역사』(최열, 열화당, 1997)

  • - 『30년대 문화예술인들』(조용만, 범양사, 1988)

  • - 『풍류세시기』(이승만, 중앙일보사, 1977)

  • - 「고려화회 출현」(『매일신보』, 1919. 11. 25)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