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당시 서울대학교 노래패 메아리, 이화여자대학교 노래패 ᄒᆞᆫ소리[한소리] , 고려대학교 노래패 노래얼 등에서 활동했던 이들이 대학을 졸업한 이후 사회에서 진보적이고 전문적인 노래운동을 하기 위해 함께 창립하였다.
대학 안에서의 노래운동에 그치지 않고 당시 한국 사회에서 노래운동의 조직적인 흐름을 만들고 한국 사회의 변혁에 기여하고자 했다.
1984년에 결성한 노래모임 새벽은 1984년 당시 서울 혜화동에 소재한 김민기의 개인 사무실에서 함께 사무실을 사용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1984년 3월 23일∼24일 애오개 소극장에서 노래이야기 「가지꽃」을 공연하며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한 새벽은 그 후 무크지 『노래 1- 진실의 노래와 거짓의 노래』의 원고료를 모아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차고에 공간을 마련하고, 1984년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음반을 발표했으며 1984년 여름과 가을경 국민대학교와 전주 전동 성당에서 「또 다시 들을 빼앗겨」 공연을 진행했다. 1985년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 가입한 새벽은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의 이름으로 민중가요를 담은 카세트 테이프를 다수 제작, 판매했다. 국민대학교 공연 실황을 1시간 분량으로 편집해서 테이프로 만든 「또다시 들을 빼앗겨」를 내놓은 이후 「부설학교(1985년)」, 「민주주의여 만세(1985년)」, 「그날이 오면(1985년)」, 「우리 가락 좋을시고(1985년)」, 「삶의 진실과 교육적 진실」, 「해방의 노래(1987년)」, 「현장의 소리(1989년)」, 「우리는 선생님을 사랑합니다(1989년)」, 「우리 노동자(1989년)」, 「저 평등의 땅에(1988년)」, 「선언」 등의 카세트테이프를 공식적인 심의를 거치지 않고 제작해서 판매했다. 1987년에는 「민중예술 한마당」 공연에 참여했고 1988년에는 「저 평등의 땅에」 공연에 참여했으며, 「통일은 그 어느 때에(1986년)」, 「신 이수일과 심순애(1987년)」,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1987년)」, 「임을 위한 행진곡(1989년)」 등의 음악극을 자체 제작했다. 1992년 6월에 「새벽 작은 음악회 1」을 진행하고, 8월에 「새벽 작은 음악회 2」를 진행했으며 9월 16일∼10월 4일까지 인켈 아트홀에서 「아름다운 생애」를 진행했다. 11월에 「새벽 작은 음악회 3」을 진행하고, 1993년 학전소극장에서 「러시아에 대한 명상」 공연을 진행한 이후 모임을 해체했다.
한국 전쟁 이후 창립된 최초의 진보적 전문 노래운동 단체로서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 소속되어 민중가요 창작곡 카세트테이프를 제작하고 자체 공연을 펼치며 1980년대 민중가요를 널리 알리고 다수의 창작자와 가수를 배출했다.
1993년 활동을 중단한 이후 2006년 4월 28일 과거의 멤버들이 모여 백암아트홀에서 「혹시, 내가 들리나요?」 공연을 진행했으나 그 이후의 활동은 없다.
대학 노래패에서 활동하던 성원들이 한국 전쟁 이후 결성한 최초의 진보적 전문 노래운동 단체이다. 이 단체가 사회에서 전문적인 음악운동을 담당함으로써 1980년대 결성된 많은 노래운동 단체들의 모델이 되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활동을 시작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모체로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결성될 수 있도록 했으며 「그날이 오면」, 「저 평등의 땅에」, 「벗이여 해방이 온다」 등 대표적인 민중가요를 다수 창작하고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보급했다. 류형수, 문대현, 문승현, 이창학, 이현관, 여계숙, 정윤경 등 민중가요 작곡가들과 김광석, 윤선애, 안치환, 임정현 등 민중가요 안팎의 가수들을 다수 배출했다. 노래모임 새벽의 활동을 통해 민중가요의 음악 역량과 공연 역량이 크게 성장했으며 고전적인 어법 등의 음악적 실험도 이루어졌고 노동자 계급 중심의 세계관에 기초한 음악적 실천들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