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로 이주한 뒤 소련군 장교와 소련 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에 우즈베크사회주의공화국[Uzbekistan]으로 강제이주되었다. 1940년부터 북극성(北極星) 집단농장(kolkhoz)의 지도자로 선출되어, 그 집단을 부유하게 만드는 데 힘썼다. 1948년과 1951년에 각각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우즈베크사회주의공화국의 대표적인 고려인 지도자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1905년 8월 6일에 함경북도 경흥군 대평재에서 농부 김치만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에 함경북도 주민들은 배고픔을 벗어나기 위해서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로 들어가 노동을 하였는데, 김치만도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간헐적으로 러시아로 들어가 일하였다. 그 뒤 1914년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러시아 연해주 수이푼(綏芬河, Suifun)지역의 차피고우로 이주하였다. 김치만이 성실하게 노력한 결과, 가족은 모두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였다. 다만 1916년에 김치만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김병화가 가장으로 생활을 꾸렸다.
김병화는 청년시절부터 주경야독으로 생활하면서 공산주의청년동맹인 콤소몰(Komsomol, Комсомол)에 가입하였다. 1924년에 오기봉과 결혼하여 2년 뒤에 큰 딸 마리아를 낳았는데, 이 때부터 1927년까지 적군(赤軍)에서 노동적위대로 복무하며 하사관 교육을 받고 분대장이 되었다. 군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공산당 가입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였지만, 1927년에 카잔(Kazan)의 저격 분대로 배치된 뒤에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8년에 큰 아들 니콜라이를 낳은 뒤, 1929년에는 중국 동부철도 전쟁에 참여하여 1931년에 소수민족으로는 드물게 모스크바의 군사학교에서 장교 교육을 받아 장교가 되었지만, 부인인 오기봉이 사망하였다. 다음해에 오병수와 재혼하여 1933년에는 둘째 아들인 보리스를 낳았다. 그러나 1939년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경비대에 체포되어 공산당 당원과 군인 신분을 박탈당하였다. 아마도 1937년에 스탈린이 자행하였던 연해주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한인 엘리트에 대한 탄압 때문으로 보인다. 곧 석방되어 공산당 당원으로 복귀하였지만, 중앙아시아 우즈베크사회주의공화국으로 이주 명령을 받았다.
우즈베크사회주의공화국으로 이주한 뒤 ‘새로운 길’ 집단농장의 건설행정 책임자로 근무하였다. 비록 강제 이주되었지만, 성실함과 함께 강력한 추진력을 인정받아 1940년에는 지역당 위원회의 추천으로 ‘북극성’ 집단농장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북극성 집단농장은 김병화의 지도에 따라 매년 높은 수확량을 달성하였고, 농장 안에 학교와 도서관을 비롯하여 은행, 발전소 등의 기반시설도 자체적으로 구축해 나갔다. 또한 셋째 아들인 에두아르드가 태어난 1943년에는 전체 조합원이 비행기 제작을 위해서 2백21만1천400루블을 모았는데, 이 때 김안톤, 이태안, 편금난 등은 각각 3만루블을 기부하였고, 김병화 역시 10만루블을 기부하였다.
북극성 집단농장의 수확량이 꾸준히 늘면서, 김병화는 1948년에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51년에도 두 번째로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아 ‘이중 노동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북극성 집단농장의 조합원 가운데서도 1949년과 1957년에 각각 15명과 11명이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 뒤 김병화는 1961년에 우즈베크사회주의공화국 최고회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그밖에도 공화국 최고회의 농업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레닌 훈장과 함께 10월혁명 훈장 등을 받았다. 1974년 5월 7일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는데, 그가 활동하였던 집단농장와 거리의 이름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김병화로(路)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