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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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물
소련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하여 폴리타젤 집단농장 지도자로 활동한 고려인 지도자.
이칭
이칭
Хван Ман Гым, Хван Тимофей Григорьевич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9년
사망 연도
1997년
본관
경기도 양주
출생지
연해주 포시예트
관련 사건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목차
정의
소련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하여 폴리타젤 집단농장 지도자로 활동한 고려인 지도자.
개설

구소련의 대표적인 고려인 지도자로, 1953년에 ‘폴리타젤(Politadel)’ 집단농장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소련 최고의 모범농장으로 만들어 ‘사회노동영웅’이라고 불렸으며, 레닌 훈장과 10월혁명 훈장을 받았다.

활동사항

본관은 양주(楊州)로, 1919년 5월 1일에 연해주 포시예트(Posyet) 지역의 노보키예프스키(Novokievskii)에서 황수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1년에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서 출생하였다는 기록도 있지만, 아들인 스타니슬라브 티모페예비치(Stanislav Timofeevich)는 1919년 출생이라고 하였다.

황수최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국경무역 상인들의 통역을 도우면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황만금이 태어난 뒤에는 적군(赤軍)에 뽑혀 복무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고, 다시 하바롭스크(Khabarovsk)로 옮겨 살았다. 황만금은 하바롭스크에서 중등 과정을 마치고 항해사가 되려고 하였다.

1937년에 황만금은 가족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하였다. 황수최는 타슈켄트(Tashkent)에서 제빵사로 일하였고, 대학교 진학을 준비하면서 1938년에 19번학교의 한국어 교사로 첫 직장을 잡았다. 그 해에 한국어 사용이 금지되자, 타슈켄트 인근의 양기율(Yangiyul) 면화공장의 노동자로 이직하였고, 1939년부터는 공산당 당원 후보로 활동하면서 경제 및 재무 담당 관리직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황만금은 1947년에 ‘레닌의 길’이라고 불리던 집단농장의 지도자가 되었고, 1951년~1953년에는 타슈켄트 주변에 자리한 치르치크(Chirchiq) 집단농장의 농업담당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여러 집단농장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결과, 1953년에는 파산 직전이었던 폴리타젤 집단농장의 지도자로 선임되었다. 이 때 집단농장의 운영 방식을 혁신적으로 바꾸었는데, 그에 따른 농업 생산성은 경이로운 결과로 나타났다. 폴리타젤 집단농장은 3년 만에 완벽히 변화하였으며, 농업 생산성은 타슈켄트주(州)에서 선두를 차지하였다. 황만금은 1957년 1월에 소련 최고 상임위원회의 명령으로 ‘사회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폴리타젤 집단농장의 구성원 가운데 10명도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1976년에 폴리타젤 집단농장은 소련 최고의 집단농장으로 인정되어, 소련을 방문하는 외국 귀빈이 반드시 견학하는 장소가 되었다. 당시 폴리타젤 집단농장에는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문화회관과 함께 2곳의 경기장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 백화점, 병원, 학교 등의 시설도 자체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으로 집권하면서 개혁 조처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자, 당시 집권층은 소비에트 경제 전반의 침체 원인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찾기 시작하였다. 곧 부유한 자들이 부정부패를 통하여 개인의 재산만 축적하였기에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러한 시각은 우즈베키스탄에도 적용되어, 지도층이 ‘면화 스캔들’이라고 불리는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당시 최고회의 의원이었던 황만금도 이러한 정치적 탄압의 희생양이 되었고, 재판이 진행되면서 무죄임이 밝혀졌지만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1989년에 황만금은 감옥에서 풀려나 폴리타젤 집단농장의 명예회장을 맡아 여생을 보냈다. 1991년에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자, 정치적인 명예를 온전히 되찾았으며,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고려인 강제이주 70년」(『연합뉴스』2007. 10. 1)
『Хван Ман Гым: Через Олимп и Голгофу』(Ким, Брутт., Ким, Михаил, Ташкент,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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