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사 사적비는 1764년(영조 40)에 은재거사(恩齋居士)가 비문을 짓고 세운 청주 상당산성 내 사찰의 사적비로, 2009년 3월 6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청주 상당산성 내에는 산성의 유지와 관리를 위해 3곳 이상의 사찰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구룡사는 그중 하나이다. 조선 말기에는 구룡사 외에도 장대사(將臺寺)와 남악사(南岳寺, 南嶽寺)가 있었다. 이중 장대사는 달리 ‘청심사(淸心寺)’ · '청심암(淸心菴)'으로도 불렸으며, 서장대(西將臺) 바로 밑에 위치한다. 남악사는 1886년(고종 23)에 보국사(輔國寺)라 하여 일제강점기까지 유지되었다. 사적비에 따르면, 구룡사는 1720년(숙종 46)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상당산성도(上黨山城圖)에는 5동의 건물과 장고(醬庫)가 있었고,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 병마절도영(兵馬節度營) 공해(公廨)에는 66칸의 건물이 있었다.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상당산성의 폐기와 같은 때로 보인다.
구룡사 사적비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부처님의 공덕을 기술하고 구룡산(九龍山)과 구룡사의 창건 배경, 상당산성의 개축 사실, 시주질이다.
금강산의 산줄기가 속리산과 선도산을 거쳐 구룡산에 이르고, 이곳에 도천(道天)이 1720년(숙종 46)에 구룡사를 세웠다. 그 후 영휴(靈休)와 지원(智圓)이 향사를 이었고, 1743년(영조 19) 대방광 극락보전(大方廣極樂寶殿)을 새로이 세웠다. 상당산성은 1716년(숙종 42)에 절도사 유성추(柳聖樞)가 개축하였다.
비문은 1764년(영조 40) 4월, 은재거사가 찬하고 전(篆)하였다. 불량시주질(佛粮施主秩)에는 통정(通政) 이원징(李元澄)의 발문과 반일(半日)을 비롯한 53명의 명단, 그리고 시주 전답이 있고, 본사질(本寺秩)에는 판사(判事) 신은(信訔) 등 28명, 석수(石手) 김태산(金泰山) 외 1명이 있으며, 추록에는 1801년(순조 1) 경주최씨의 시주질이 있다.
구룡사 사적비는 원래 상당산성 안쪽 남동쪽, 서남암문 안쪽에 있던 사찰의 사적비다. 구룡사 터의 입구에는 석축이 완연한 우물과 비좌가 남아있고, 절터는 잡목이 우거져 있다. 사적비는 1970년대 상당산성 남문 앞으로 옮겨와 비좌를 새로 갖추어 세운 것이다.
구룡사 사적비는 다른 사찰의 사적비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산성 내 3곳의 사찰이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사적비가 남아있는 유일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비를 통해 구룡사의 창건 연혁과 상당산성의 개축 사실을 알 수 있다.
구룡사는 임진왜란 이후, 주요 산성의 보수를 위해 사찰이 운영되었던 사실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다. 특히 사적비를 통해 사찰의 창건 시기와 운영 현황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시주질을 통해 당시 신분사와 경제사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