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3년(숙종 29)에 건립한 흥국사 중수 사적비로, 비문은 최창대가 지었고 글씨는 이진휴, 뒷면의 발문은 정동호가 지었으며 문세욱(文世郁)이 썼다. 중수에 참여한 140여 명의 인명록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2011년 12월 20일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흥국사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1703년(숙종 29)에 흥국사의 승려 성능(性能)이 최창대(崔昌大, 1669∼1720)를 찾아가 비문을 청하여 이진휴(李震休, 1657∼1710)로부터 전제와 비문 글씨를 받아 1703년(숙종 29) 6월에 비를 건립하였다. 뒷면의 발문은 흥국사 승려 혜일(慧日) 석철(碩哲)이 주도하여 정동호(鄭東虎, 1665~1706)에게 발문을 청하였고, 참여 협조한 시주질과 삼강록 등 140여 명의 인명록을 새겼다. 비문 건립 당시 흥국사는 순천 도호부에 속한 지역이었고, 흥국사에 주진하는 의승수군은 전라좌수영의 관할을 받았다. 1897년(광무 1)에 여수군이 신설되면서 여수에 속하게 되었다.
이 사적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었고, 앞면과 뒷면에 비문이 있다. 앞면에 전제(篆題)와 비제(碑題), 비문, 비명이 있고 뒷면 위부분에는 발문, 아랫 부분은 참여한 인명록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앞면의 전제는 ‘영취산 흥국사 중수사적비(靈鷲山 興國寺 重修事蹟碑)’이고, 비제는 ‘유명조선국 전라도순천영취산 흥국사중수사적비명병서(有明朝鮮國 全羅道順天靈鷲山 興國寺重修事蹟碑銘幷序)’이다. 비문은 22행으로, 1행 53자이다. 끝에 비문을 지은 이와 전서 및 비문 글씨를 쓴 사람, 그리고 연기를 적고 있다. 비문의 지은이는 ‘중훈대부 행홍문관수찬지제교 겸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 최창대찬(中訓大夫 行弘文館脩撰知製敎 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崔昌大讚)'이고, 전서와 비문 글씨는 '가선대부 행승정원도승지 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 이진휴병전(嘉善大夫 行承政院都承旨 兼經筵叅賛官春秋館修撰官 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李震休書幷篆)’이며, 연기는 ‘숭정갑신후육십년 계미육월일립(崇禎甲申後六十年 癸未六月日立)’이라 하여 1703년(숙종 29)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을 지은 최창대는 영의정 최석정의 아들로서 당대의 명문장이었고, 비문을 쓴 이진휴도 숙종대에 「통도사 사리탑비」, 「선암사 중수비」 등 많은 작품을 남긴 명필이었다. 선암사 중수비는 1982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성능이 주도하여 중수비문을 청한 것, 보조국사의 흥국사 창건, 임진왜란기의 소실, 1560년(명종 15) 법수화상(法守和尙)에 의한 사찰 건물 증축, 1624년(인조 2) 계특(戒特)의 대대적인 사찰 중건, 그리고 1690년(숙종 16) 통일(通日)의 법당 개축 사실 등 흥국사의 사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다.
뒷면에는 정동호가 지은 발문을 문세욱(文世郁)이 썼다. 내용은 혜일 석철이 발문을 청한 것, 흥국사의 창사와 중건 과정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즉, 보조국사가 흥국사를 창건한 이래 조선에 들어와 임진왜란을 겪으며 온갖 고충을 극복하며 약 470년 동안 중건한 승려들을 높이 평가한 내용이다.
뒷면 아랫 부분에는 윗부분 발문과 약간의 간격을 두고 6단에 걸쳐 비를 건립할 때 협조한 김덕항(金德恒), 수군절도사 이휘(李暉), 주지 자언(慈彦), 석정(碩淨)를 비롯한 140여 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중건 과정에 도움을 준 지방관과 중앙 정계의 인물, 관련 승려, 여성을 포함한 신도, 그리고 석공들의 명단까지 기록되어서 당시 중수비의 건립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다만, 중간 부분에 균열이 가고 박락된 부분이 있어 판독에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다.
비의 귀부는 그리 섬세한 편은 아니나 귀갑문은 뚜렷하게 조식되었으며, 이수는 일부 떨어져나간 부분이 있지만 측면의 구름 무늬와 그 안의 두 마리 용의 모습은 정교하게 양각되었다.
이 사적비의 특징은 조선 후기에 건립된 사찰 사적비로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는 점, 전체 높이 270㎝ 규모의 대형 석비라는 점, 비문을 지은 최창대와 글씨를 쓴 이진휴가 3품 이상의 문관직에 있던 당대 명문장가와 명필이라는 점, 발문과 140여 명의 인명록이 있다는 점, 흥국사의 연혁과 중수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이 비는 흥국사의 창건과 중수 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비석의 이수 장식문과 쌍룡이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었고, 비문도 육안으로 거의 판별할 수 있기 때문에 불교사와 불교 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조선 후기 호남 불교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